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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밴드' 이탈한 달러…"글로벌 환율전쟁 포성 울릴 것"[관점]

■힘 빠진 달러·길 잃은 美 환율정책

美, '역플라자 합의' 이후 '슈퍼 달러' 표방했지만 현실은 반대

'헬리콥터 머니' 살포에 올 고점대비 12% 추락…내년 추가 하락

연준 발권력이 환율시장 '게임 체인저'…단기 변수는 백신 효능

바이든 행정부도 약세 용인 전망…자산버블·환율리스크 고조





지난 1995년 1월 취임한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은 미국의 달러 정책을 180도 바꾼 인물이다. 그는 10년 전 일본의 팔을 비틀어 약달러·강엔을 유도한 ‘플라자합의’ 이후에도 무역 적자가 줄어들지 않자 ‘강달러가 미 국익에 부합한다’며 슈퍼 달러 정책을 표방했다. 기축통화국이 달러 공급을 위해서는 무역 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트리핀의 딜레마’를 인정하는 대신 자본수지 흑자로 교역 역조를 벌충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루빈 독트린’으로 일컫는다. 루빈 장관은 취임 3개월 만에 강달러·약엔을 유도하는 ‘역플라자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달러 가치는 1999년까지 25% 수직 상승했다.

강달러 정책은 루빈 장관 이후 미 재무부 환율 정책의 핵심을 이뤄왔다. 달러 강세는 기축통화인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 선결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달러 강세는 해외의 미 국채 수요를 뒷받침하고 수입 물가를 낮춰 소비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다. ‘강달러=미 이익’이라는 등식은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강달러 정책은 모래성 쌓기와 다름없었다. 환율은 특정 국가의 경제 기초 체력에 따라 움직이는데, 미국은 만성적 쌍둥이(재정·무역) 적자로 자국 통화 가치를 유지하는데 근본적 한계를 노출한 것이다. 이는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위상 추락과 달러로 움직이는 세계경제 질서의 균열을 의미한다.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1998년 7월 한국을 방문한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이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헬리콥터 머니’ 살포에 달러 가치가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18일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2년 8개월 만에 90 선이 무너졌다. 올해 고점(3월 20일) 대비 12% 급락했고 연초 대비로도 6% 넘게 떨어졌다. 11월 미 대선 이후 달러 추락 속도는 가팔라졌다.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될 조 바이든 행정부가 공격적인 경기 부양책을 펼쳐 재정 적자를 부풀릴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발권력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국제 환율 시장의 대표적인 ‘게임 체인저’로 꼽힌다. 연준은 3월 무제한 양적 완화를 선언하고 지금까지 최소 3조 달러의 유동성을 뿌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연준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실시한 양적 완화 규모와 같다. 미 국내총생산(GDP)의 15%, 우리나라 2년 치 GDP와 맞먹는 엄청난 규모다. 한국은행은 유럽중앙은행(ECB) 보고서를 인용해 “ECB 자산 대비 연준 자산 규모가 1%포인트 증가하면 유로화 대비 달러 가치가 9개월 뒤 0.35% 하락한다”고 설명했다. 헬리콥터 머니 살포가 기축통화를 흔드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달러 하락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추세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해외 투자은행(IB)들은 내년 달러 약세에 베팅하는 분위기다. 골드만삭스는 “달러 가치가 10% 고평가됐다”며 “앞으로 1년 동안 6% 추가 하락하고 오는 2024년까지 약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룸버그통신이 집계한 주요 투자은행의 내년 말 달러인덱스는 23일 현재 88.7(중간값 기준)을 나타내고 있다. BNP파리바는 내년 말 87.6, 2023년 말 84.2를 제시하고 있다. 악재는 차고 넘친다. 연준은 16일(현지 시간) △제로 금리 2023년까지 유지 △양적 완화의 중단 없는 실시 등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게다가 미 경제는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더블딥(이중 경기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 경제는 2차 대전 이후 사상 최장(2009년 6월~2020년 2월)의 경기 확장 국면이 끝난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을 받았다. 로이터통신은 “연준의 자산 규모가 내년 말 최대 10조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내년에 3조 달러가 더 풀린다는 얘기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1일(현지 시간) 델하웨어주 뉴어크의 한 병원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있다. /AP연합뉴스




달러 움직임을 가르는 단기 변수는 코로나19 백신. 백신의 효능이 입증돼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진정 국면을 맞으면 글로벌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이는 위험 자산 투자 심리 재개→달러 하락으로 이어진다. 씨티그룹은 이를 근거로 월가에서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내년에 달러 가치가 20% 급락한다는 예측이다.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로 이름을 날렸던 스티븐 로치(전 모건스탠리 수석 이코노미스트) 예일대 교수는 아예 달러 붕괴론까지 거론한다. 그는 “기축통화의 과도한 특권이 사라지고 있다”며 “달러가 35% 추락할 것이라는 ‘미친 소리’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쯤 되자 미 조야에서는 약달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루빈 장관의 후임인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재닛 옐런 차기 재무장관 내정자 발표에 앞서 공개서한을 통해 “달러의 강력한 경쟁자가 없지만 미국은 전통적인 강달러 정책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미국의 강달러 정책은 한낱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국제금융 관료 출신인 최희남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1995년 미국이 강달러를 표방한 후 실제 정책으로 이어진 사례는 전무하다”며 “오히려 약달러를 즐겼고 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달러 발언은 기축통화 지위에 대한 대외적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이 금본위제를 일방 폐기한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슈퍼 달러 시대는 플라자합의 직전인 1980년대 초·중반과 역플라자합의 이후인 1990년대 중후반 딱 두 차례에 불과하다. 2000년대 이후 달러인덱스가 기준점(1973=100)을 넘긴 시기는 2017년 단 한 해뿐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초대 재무장관에 지명된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이 1일(현지 시간) 델라웨어주 웰밍턴에서 열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렇다면 내년 1월 20일 출범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는 추락하는 달러를 좌시할 것인가. 블럼버그통신은 “옐런 지명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의 달러 정책 혼선을 끝내는 신호”라면서도 “옐런의 우선순위는 경기회복이지 환율은 주요 관심사가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약달러 용인에 무게가 실린다는 얘기다. 미국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기 방어를 위해서는 돈을 뿌려야 하지만 이것이 달러 위상 약화를 초래할 수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시각이다. 이주호 국제금융센터 전문위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약달러와 강달러 지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것은 달러 정책의 딜레마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글로벌 외환 딜러 사이에서는 ‘트럼프 밴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달러인덱스가 90 선을 위협받으면 미국이 ‘강달러를 원한다’고 말하고 반대로 100 선을 뚫고 올라갈 즈음에는 ‘강달러가 미국을 죽인다’며 구두 개입에 나섰다는 것이다.

기축통화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러를 대체할 대안 통화가 사실상 부재한 게 엄연한 현실이다. 최 사장은 “달러 가치 추락을 패권의 붕괴로 연결 짓는 것은 무리”라며 “팬데믹이 다시 나타나면 전 세계는 달러 사재기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달러는 2002년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까지 39% 떨어졌으나 달러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인 ‘팍스 달러리움’은 여전히 건재하다.

약달러가 초래할 현실적 위험 요인은 글로벌 환율 전쟁의 재연 가능성이다. 조짐은 이미 감지된다. 미국은 지난주 스위스와 베트남을 사상 처음으로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했다. 태국과 대만이 다음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지금의 달러 흐름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와 흡사하다. 2009년 미국의 양적 완화로 환율 전쟁의 신호탄이 오르자 2013년 아베노믹스로 확전하더니 2015년 유럽에서 다시 포성이 올렸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유럽과 일본이 미국처럼 경쟁적 돈 풀기에 나서면 환율 전쟁이 재발할 것”이라며 “각 경제주체들은 약달러발 자산 거품과 환율 변동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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