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연구 기관인 국립외교원 수장의 한미 동맹 관련 인식이 파문을 낳고 있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30일 공개한 저서에서 “긴 시간 동안 한미 동맹은 신화가 됐고 한국은 동맹에 중독됐다”며 “압도적인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 현상과 닮아 있다”고 주장했다. 한미 관계를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그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라는 뜻의 가스라이팅에 비유하면서 한국을 동맹에 중독된 나라로 비하한 것이다.
김 원장의 주장은 70년 동안 이어진 한미 동맹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뒤흔드는 위험한 인식이다. 그는 “한국은 안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사이비 종교를 따르는 무리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강변했다. “대북 강경책은 미국에 대한 충성 서약” “주한미군 철수는 평화 체제 구축 과정” 등의 궤변도 쏟아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주한 미군 철수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외교안보 분야 싱크탱크의 책임자가 ‘학자로서의 개인적 소신’이라며 이런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으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더욱이 미중 간 패권 다툼으로 한미 동맹에도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민감한 시점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 정책 재검토 완료를 앞두고 가뜩이나 균열 조짐을 보이는 한미 관계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김 원장은 일찍이 친미주의와 맹목적 동맹지상주의가 우리 외교의 손발을 묶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인식을 가진 인사에게 외교원장을 맡겼다니 임명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도 같은지 묻고 싶다. 외교가 안팎에서는 김 원장의 저서 내용이 현 정권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우방이라도 국익과 안보 차원에서 할 말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인권 등에 기초한 가치 동맹의 근간마저 흔들려 한다면 다른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논설위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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