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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90> ‘청년절’로 띄운 5·4, 사라진 6·4...中共 유불리에 중국史도 비틀어져

■ 中서 ‘5·4’와 ‘6·4’ 대우는 왜 달라졌나

지난 2일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 놓여진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의 사진. 5·4운동 102주년을 앞두고 쑨원을 부각시키고 있다. /AP연합뉴스




5월은 우리나라에서 가정의 달로 가족과 어린이들이 주로 언급이 되지만 중국에서는 ‘청년’에 초점이 맞춰진다. 1919년 5월 4일에 일어난 5·4운동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다. 중국에서 5월 4일은 공식적으로 ‘5·4청년절(五四靑年節)’이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대학생 등 청년들에게 ‘공산당과 국가를 위해 청춘을 바치라’는 선전을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5·4운동을 이야기할 경우 바로 다음 달로 돌아오는 6·4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1989년 ‘6·4 톈안먼(천안문) 민주화 시위’로 불리는 그 사건이다. 5·4나 6·4 모두 공통점이 있다. 당시의 지식층인 대학생 등 청년들이 주도했고 기존 체제에 대해 개혁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베이징 텐안먼광장을 주 무대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에서 5·4운동은 둘도 없이 중요한 사건이지만 6·4운동은 입도 벙긋할 수 없게 돼 있다. 5·4는 그 직후 중국공산당(중공) 창당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건국으로 이어졌지만 6·4는 공산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다. 6·4도 정확히 말하면 공산당 개혁을 요구했지만 당시 권력자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공산당 전체에 반대로 해석된 것이다.

최근 중국 내외에서 두 사건과 관련된 행사가 연이어 벌어졌다. 중국은 4일 공산당 산하 단체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과 중화전국청년연합회 이름으로 ‘제25회 중국청년5·4휘장(中國靑年五四奬章)’ 대상자를 발표했다. 개인 34명, 단체 20곳이 각각 휘장을 받았다. 대상자는 대개 공산당원 위주다.

지난해 6월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의 ‘몽둥이 충돌’ 당시 사상자들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들은 ‘신시대 국가·국경을 지킨 영웅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받았다. 중국 정부는 충돌 당시 자국군의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다가, 긴장이 어느 정도 완화된 지난 2월 모두 4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공개한 바 있다. 이들이 당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아직도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수상자가 된 것이다.

또 현직 공안(경찰)에서 개인 1명과 단체 2곳이 선정된 것은 이 상의 성격을 보여준다. 관영 신화통신은 “공산당의 지시를 잘 따르고 뜻을 세워 분투한 청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휘장을 수여한다”고 전했다. 국가를 위한 청년들의 희생을 강조하는 취지에서 시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상자 개인 34명 가운데 비(非)한족 소수민족이 7명(21%)이나 포함돼 있다는 것도 주목을 받았다. 중국 내에서 비한족의 인구가 전체의 8%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평균 이상의 대우를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 등 서방의 소수민족 인권 문제 제기에 대한 중국 나름의 반응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이 5·4운동을 계승해 분투하자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 포스터 모습. 포스터에 보이는 1921년은 중공의 창당 연도다. /신화망


이에 앞서 지난 2일 홍콩에서는 톈안먼 사태 관련 추모행사가 열렸다. 홍콩 매체들에 따르면 이날 홍콩대에서는 ‘수치의 기둥(Pillar of Shame)’을 청소하는 연례행사가 열렸다. ’수치의 기둥‘은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추모하는 조각상으로 1997년 홍콩대에 세워졌다. 매년 톈안먼 시위 추모 집회를 주최해온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가 이 행사를 진행했다. 홍콩 제1야당인 민주당의 주석을 역임한 앨버트 호 지련회 부주석은 “홍콩이 여전히 살아있는지 아니면 이미 죽었는지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반면 지련회가 매년 6월 4일 홍콩 빅토리아파크에서 진행해 온 톈안먼 시위 추모 집회는 홍콩 정부에 의해 지난해 불허된 데 이어 올해도 불허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 추모 집회가 불허된 것은 톈안먼 사태 이후 처음이었다.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으로 경직돼 가고 있는 홍콩의 사정을 보여줬다.

정작 베이징에서 두 사건의 공통된 현장인 텐안먼광장은 현재 공안 등 중무장 병력에 의해 삼엄하게 포위돼 있다. 외신 기자들의 광장 출입은 아예 금지됐고 자국민들 출입자도 일일이 소지품 검사를 하는 등 검문검색을 강화한 상태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해석에 따르면 “5.4운동은 철저한 반제국주의이자 반봉건주의 애국운동으로,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기원”이다. 여기서 ‘신민주주의 혁명’라는 것은 공산당이 주도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그 이전에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이 주도한 ‘구민주주의 혁명’과 구별된다. 즉 5·4운동이 중국 공산당의 독점적 기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지나친 아전인수다. 중국 밖에서는 누구도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史實)처럼 1919년 5·4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일본제국주의에게 빼앗긴 산둥성 등의 이권을 되찾자는 학생들의 요구로 시작됐다. 학생들은 그해 5월 4일 톈안먼광장에 모여 반대집회와 시위를 진행했고 이어 지방으로 운동이 확산됐다.

중국이 신해혁명으로 공화국이 된 이후 지식인들에게 확산돼 있던 반봉건주의, 반제주의 사상이 ‘과학’과 ‘민주주의’에 기반한 신문화운동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군벌정부가 이 운동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가하면서 점차 문화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성격이 바뀐다.

신문화운동에 대한 참여자는 후스(호적) 등 우파 성향부터 천두슈(진독수) 등 좌파 성향까지 다양했다. 반봉건·제국주의에서는 일치한 이들이 이데올로기 차이로 갈라서게 됐는데 결국 천두슈 등은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우파 성향의 인물들은 국민당으로 옮겨갔다.

즉 5·4운동은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공산당에 참여한 인물들은 5·4운동에서 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근원을 이 운동에 두었지만, 당시에도 이미 중요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국민당으로서는 5·4운동이 세력 보태기에 불과했다.



이후 공산당은 5·4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중국은 청 제국이 무너진 신해혁명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대신 5·4운동을 사실상 현대사의 시작으로 주장한다. 마오쩌둥이 처음 활동을 시작한 것도 5·4 시기다.

흥미로운 점은 5월이 되면 중화민국의 국부로 불리는 쑨원(손문)의 대형 초상화가 텐안먼광장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정작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10월 10일)에는 보이지 않던 쑨원에게 5월 4일엔 한자리를 주는 것이다.

쌍십절 자체는 중화민국(대만)의 건국 기념일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의도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 최근 쑨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대만과의 통일 문제가 부각되면서 대만의 국부이기도 한 쑨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연관된다.

노동절을 앞둔 지난 4월 27일 베이징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중국 국가를 부르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는 중국 내에서 철저하게 부정된다. 이를 보도하는 매체는 없고 일반인들도 언급을 삼간다. 중국 정부가 꼭 이를 언급해야 할 때도 6·4는 없고 톈안먼도 나오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당초 이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으나, 2000년 장쩌민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 풍파’라는 표현을 사용한 후 사실상 이를 공식명칭으로 삼고 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해 6월 4일 정례 브리핑에서 해외의 비판에 대해 “1980년대 말 발생한 정치 풍파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이미 분명한 결론을 내렸다”며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여년 동안 이룬 위대한 성취는 우리가 선택한 발전 경로(톈안먼 시위 진압)가 완전히 옳았음을 충분히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왜 중국내 인터넷 등에서 6·4정보를 검열하느냐’는 한 외신기자의 질문에는 “중국 정부의 인터넷 관리는 관련 법률에 따른다”고 하며 피해갔다.

이와 관련, 차이잉원 중화민국 총통(대만 대통령)은 “지구 상의 어떤 지역도 1분은 60초지만, 중국은 매년 364일만 있고, 하루를 잊어버린다”면서 “대만도 과거에는 달력에 넣을 수 없는 많은 날이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하나 이날들을 되찾아 왔다”고 톈안먼 사건을 외면하는 중국 당국을 비난한 바 있다.

지난 2019년 4월 3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5.4운동10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연설 도중 졸거나 하품하는 모습이 생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중국의 통제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으로 해석돼 주목받았다. /CCTV캡처


중국이 이른바 ‘개혁개방’에 나선 1978년 이후 중국 경제는 앞서의 문화대혁명의 동란에서 벗어나 급속히 회복됐다. 다만 개혁개방으로 오히려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는 경제성장과 함께 생긴 급격한 빈부격차였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덩샤오핑은 선부론을 주장하며 될 수 있는 사람과 지역이 먼저 부자가 되라고 했지만 대학생 등 지식인들은 사회정의가 후퇴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와 함께 경제개혁과 함께 이뤄질 것으로 바랬던 정치개혁이 무산된 것이다. 공산당은 여전히 ‘공산당 영도’라는 이름으로 일당독재를 계속하고 있었고 이는 청년들의 열망과 배치됐다.

마침 정치와 사회개혁에 우호적이었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공산당에서 퇴출돼 사망한 것을 계기로 청년들이 시위를 벌인 것에서 6·4운동이 시작됐다. 시작은 70년 전의 5·4와 비슷했다. 다만 결과는 달랐는데 과거 군벌 정권과는 달리 공산당 정권은 철저한 탄압으로 응수했다. 톈안먼 시위는 결국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진압됐다.

톈안먼 진압 이후 새로운 최고 권력자로 등장한 것이 장쩌민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다. 그는 절저한 반(反)6·4파였고 이후 이런 경향은 후진타오에 이어 현재의 시진핑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6·4를 인정할 경우 지도부의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중공의 우려다.

지난 2일 홍콩 홍콩대에서 ‘수치의 기둥(Pillar of Shame)’ 청소 연례행사가 열리고 있다.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품으로 지난 1997년 세워진 후 매년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진핑 정부 들어 ‘5·4 띄우기’와 ‘6·4 죽이기’는 계속되고 있다. 6·4 죽이기는 이미 수십년 동안 계속돼 온 것이지만 5·4 띄우기는 다소간의 변화를 겪었다. 5·4는 오히려 더욱 청년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개인을 버리고 중국 공산당과 국가를 위해 일할 것을 주장하는 모멘텀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와 같은 글로벌 초연결 사회에서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중국 선전 담당들이 모를리 없다. 중국이 최근들어 공산당 역사 학습 등 체제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다. 이미 외부 정보가 철저히 통제된 상황에서, 중국인에 대한 세뇌 성격의 교육을 더욱 강화해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3월 23일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는 올해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갖겠다고 하면서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창당 행사를 한다면서 당사 교육의 심화가 첫번째로 제시됐다. 이어 다양한 창당 100주년 경축 행사 개최, 7·1훈장(七一勳章, 중공창당 기념일 서훈) 등 수여식, 대형 전시회 및 문화예술공연 개최, 이론 세미나와 좌담회 개최 등이 나열됐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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