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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 청춘 코스프레

정영현 문화부 차장





어린 시절 즐겨봤던 TV 프로그램이 있다. MBC에서 방영했던 ‘퀴즈 아카데미’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답을 척척 내놓는 대학생들은 어린 시청자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자주 보다 보니 프로그램 주제곡도 외워 불렀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리듬은 경쾌했고 꽃과 나비, 봄바람, 흰 눈 같은 단어로 가득한 가사는 마치 동요 같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얼마 전 이 노래를 우연히 다시 접했다. 꽃과 나비가 아니라 ‘미싱’과 공장에 방점이 찍힌 내용이라는 것은 성인이 된 후 자연스레 알게 됐지만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청춘이 저물도록’ 공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가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싶어졌다. 그 시절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는 나이였다고는 하나 스튜디오 조명 아래 박수를 받는 대학생 언니·오빠만 청춘이라고 생각했던 게 너무 미안하다고 늦게나마 사과하려는 마음이 들었다.

서로 다른 청춘. 누군가가 대학생 퀴즈왕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는 야간 학습의 기회마저 빼앗긴 채 각성제를 먹고 철야 노동을 해야 했음을 새삼 다시 기억해본다.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청춘의 얼굴은 결코 같지 않음을 생각해본다. 아무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하나 모든 청춘이 다이아몬드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청춘은 ‘MZ세대’라는, 괜히 근사하게 느껴지는 말로만 대변되는 듯하다. MZ 소비, MZ 투자, MZ 가치관 등의 용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사회는 과하게 MZ 열공 중이다. 때로는 마냥 풍요롭게 자랐다는 의미로 이들을 ‘자본주의 키즈’라 부르고 롤러코스터 타듯이 인생을 즐긴다며 ‘롤코라이프’라는 신조어를 들이대기도 한다.

MZ 열공에 나선 어른들의 행태는 더욱 기이하다. 갑자기 힙합 모자를 삐딱하게 쓴 채 청바지를 입고 등장하는가 하면, 하루 아침에 익히기 어려운 시뮬레이션 게임을 한다며 모니터 앞에 앉기도 한다. 유튜브 방송에 등장해 어색한 말투로 뒷얘기를 풀고, 암호화폐에 투자해봤다면서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청년과 눈높이를 맞추고 관심을 갖겠다는 뜻은 알겠지만 일회성, 그마저도 일부 청년에게만 해당하는 이벤트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게다가 자전거를 타는 30대 제1야당 당 대표의 탄생을 계기로 청년 ‘코스프레’를 하는 어른들이 등장할 가능성은 더 커졌다.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된 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청춘은 따로 있지 않은가. 혼자서도 충분히 빛나는 청춘 옆에서 그 빛을 탐하지는 말자. 어른들이 할 일은 그늘진 곳에 머물고 있는 청춘을 조용히 돕는 것이다. 조금만 햇빛 바른 쪽으로 밀어주면 밝게 빛날 수 있는 청춘, 그들의 얼굴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내는 일 말이다.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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