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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미지로의 고독한 여행이 걸작 만든다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트랜스와 예술창작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도저히 인간이 못 만들것 같은 대작

神의 힘 '+α' 개입으로 해명 가능

神적 광기인 자기초월·몰입 단계서

나도 몰란덨 또다른 나의 조력으로

모방할 수없는 독창성·아우라 발현

그리스 델파이 신전에서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




심한 떨림, 마비, 호흡곤란, 시선의 흐트러짐과 같은 징후와 함께 평상시 자기 모습을 뛰어넘는 상태에 진입하는 것을 통상 ‘트랜스(trance)’라고 부른다. 소위 접신 상태다. ‘종교 유전자’에서 니콜라스 웨이드는 트랜스를 어떤 ‘느낌’으로 설명한다. 자기로부터 벗어 나는, 자신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느낌, 시공간을 초월하고 궁극의 진리를 인식하고 신성과 합일한 느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긍정의 느낌이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이것은 창작 중인 예술가의 심리, 혹은 신비 성향의 종교가나 철학자의 마음 상태와 유사하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예술 창작 작가의 이런 모습을 논할 때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작품이다. 누가 보더라도 탁월한 작품의 현존이 없다면 예술가의 트랜스는 무의미해진다. 기껏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쇼맨십으로 의미가 축소될 수 있다. 요즘은 행위 예술이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여기 빛나는 군계일학의 작품이 있다.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감탄을 연발한다.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부터 탄성이 터져나온다. 다음으로 어떻게 그런 작품을 창작했는지 궁금해 한다. 작품이 작가에게서 나온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를 바라본다. 그런데 작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나아가 작가의 생에 감춰진 스토리를 찾아본다. 거기에서 약간의 비범함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작품의 빛나는 현존에는 무엇인가 더 덧붙여져야만 할 것 같다. ‘훌륭한 작품=작가+α’라는 방정식에서 관건은 ‘+α’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트랜스다. 신의 힘을 도입함으로써 도저히 인간이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는 해명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를 만나려면, 먼저 유한하게 확정된 자기를 버려야 한다. 인간으로부터 신으로의 이행은 광기에 침몰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오한이 일어나고 눈의 초점이 사라지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음색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신적 광기란 자기를 초월해 신과 합일한 황홀경 혹은 전적인 몰입이라 말할 수 있겠다. 경이로운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이런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작품의 신비한 아우라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만일 현대인들이 그런 작품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이런 해명이 억지처럼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프로디테상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는 고대인들의 정신 상태를 ‘과대망상(근대인은 강박, 현대인은 정신 분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컨대 그들은 예쁜 아가씨를 보고 아프로디테의 현현이라고 호들갑 떨고, 아름다운 작품을 보며 신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며 쉽게 과대망상에 빠진다. 정보와 지식이 없던 시절이기에 그럴 수 있다. 아니면 지극히 자극적인 감각 환경에 살다 보니 오히려 감각이 무뎌져서 제대로 감지해내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트랜스 혹은 신적 광기를 통한 작품 창작 해명이 구닥다리 옛이야기가 돼버린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천재는 예술가 트랜스의 또 다른 버전이다. 영어 ‘지니어스(genius)’는 라틴어 게니우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특정 개인이나 토지의 수호신을 뜻한다. ‘탄생’한 개인마다 ‘주어진’ 수호천사다. 인간이 탄생의 신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요즘처럼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발달한 시대에 신비 운운하는 것은 가당찮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제작’된 클론과 ‘탄생’한 우리가 과연 동일한 존재일까. 만약 다르다면 어떤 점이 다를까.

제작된 클론은 분명한 존재의 목적이 있다. 반면 탄생한 아기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왜 어떤 목적으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물론 부모가 제멋대로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수정되는 순간부터 온갖 우연성이 개입되기에 그 목적이 관철되기는 어렵다. 이렇듯 탄생의 신비는 생의 무목적성을 뜻하며 그것이 미지의 끝없는 가장자리를 남긴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도 몰랐던 낯선 나의 등장이 가능하며 내 안의 타자적 힘을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작품’이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낸 ‘제품’이 아니라면 작품은 유일무이한 독특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 작품을 창작하는 독창성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방과 학습으로 어림없는 독창성이 있어야만 작품에서 독특한 아우라가 내뿜어질 것이다. 독창성의 출처는 사회화돼 균질화된 자기와는 다른 곳이어야 할 것이다. 타자 혹은 기존의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나의 조력으로 작품의 탁월성이 설명될 수 있다. 말하자면 작품의 ‘+α’는 미지의 세계로 이행하는(trans) 고독한 여행이 가져온 기묘한 기념품이다.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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