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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내칼럼
[여명]성장 정체의 혹독한 대가

최형욱 금융부장

한국, 재분배 골몰하다 성장 뒷전

결과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대선주자들 여전히 퍼주기 공약

‘미래·혁신’은 차차기로 미룰 판





고등학교 때 소설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길동의 아버지 홍문은 자애롭고 강직한 인물로 나오는데 왜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아들을 노비로 삼았을까.

명종 9년(1554년) 조선 지배계급은 아버지가 같더라도 어머니가 노비이면 이복형제라도 종으로 부려야 한다는 법령을 강제했다. 중국 명나라 형법과 조선 초기 법전에도 배다른 형제를 노비로 삼지 말라는 말이 없으니 면천(免賤)을 해주면 안 된다는 기괴한 논리였다. 후대의 허균(1569~1618)이 지었다고 알려진 ‘홍길동전’에서 홍문이 자식을 재산으로 취급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 전개였던 셈이다. ‘인의예지신’을 입에 달고 살았던 조선의 양반들은 왜 이렇게 천륜을 어기고 집단적인 패륜을 저질렀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총생산성을 높이려면 자본과 노동·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상인들을 착취했다. 자본이 축적될 리 없었다. 기득권이 흔들릴까 두려워 혁신 기술 개발도 가로막았다. 게다가 무위도식하던 양반들은 직접 일하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유일한 생존 수단은 노비라는 노예 노동을 늘리는 것뿐이었다. 경제성장은 정체됐고 사대부들은 제한된 밥그릇을 놓고 서로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며 피비린내가 나도록 싸웠다. 또 양민들은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부를 쌓을 기회가 막혀 있던 탓에 평등과 분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콩 한쪽도 나눠 먹어야 했고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졌다.

뿌리 깊은 평등 의식은 과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과 외환위기 같은 국가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자원 배분을 왜곡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사회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기도 한다. 모든 학생이 한 교실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는 평등화 교육 시스템이 단적인 사례다. 자율성과 다양성이 생명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인데도 국민 정서법에 기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 해소 문제도 마찬가지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혁신도시를 설계할 때 공공기관을 선심 쓰듯 지방 도시에 하나씩 나눠줄 게 아니라 서울에 맞먹을 만한 거점도시 2~3개를 육성한다는 전략 아래 인력과 자원을 몰아줬다면 어떤 결과를 맞았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수도권 집중이나 지방대학 초토화 현상이 완화됐을 것이다.

역대 정부가 이런 시혜성 정책을 편 것은 정권 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한 효율적인 자원 배분과 신산업 발굴은 혁신과 이해 관계자 간의 갈등 조정이라는 힘든 과정을 수반하지만 기존의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길이며 표를 모으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문재인 정부 역시 기업인과 전문가들을 홀대하고 경제 혁신에는 손을 놓은 채 재정을 풀고 기존의 일자리를 나눠주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성장이 멈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고도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제로섬’ 경쟁에 몰리고 있다. 승자독식의 복지 없는 성장도 큰 문제지만 성장이 없으면 일자리가 줄고 계층 이동 자체가 막힌다. 살기가 힘들어지자 계층 간, 남녀 간, 대·중소기업 간, 골목상권과 플랫폼 업체 간 갈등이 폭발하고 혐오와 불만, 극한 경쟁이 만연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한국 사회에 재연되는 듯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야를 막론하고 대다수 대선 주자들은 정략적인 진영 싸움에 골몰하거나 기본소득, 재정 투입 등과 같은 퍼 주기식 공약만 내놓고 있다. 미래와 혁신·성장을 위한 경제 운영 체제와 시스템 정비는 차차기 정부로 또다시 미뤄야 할 판이다./choihu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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