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도가 아닌데, 기계가 자꾸만 ‘일을 멈추라’고 권할 때가 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자꾸만 업데이트를 요구할 때다. 휴대폰의 각종 앱도 자주 업데이트를 요구하고, 컴퓨터도 걸핏하면 ‘업데이트를 지금 진행하시겠습니까, 나중에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서 사람을 고민하게 만든다. 한참 열심히 글을 쓰고 있던 나는 멍해진다. 생각의 흐름이 기계 때문에 방해를 받으면, 그 흐트러진 집중력을 다시 찾기 어렵다. ‘업데이트 하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나는 업데이트가 필요 없는데, 세상은 자꾸 내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라고, 더 빨라지라고 요구한다. 내가 너무 느린 걸까. 난 변화를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 잽싸고 민첩하게 사회의 요구에 따라 변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0)의 문장은 더욱 크나큰 위로로 다가온다. ‘월든’에서 소로는 누구나 자신에게만 들리는 북소리 장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누군가 남들과 보조를 맞추어 걷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그에게 들리는 북소리 장단이 그의 동료들에게 들리는 북소리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 어떤 북소리가 들릴지라도 각자 자신에게 들리는 북소리 장단에 맞춰 발걸음을 내디디면 될 일이라고. 인간이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장하기를 바라서는 안 되니까. 봄을 다그쳐서 빨리 여름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니. ‘월든’의 이 대목을 다시 찾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은 ‘나만의 북소리’를 되찾는 기쁨으로 가득 찬다. 정말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자신에게만 들리는 세상의 북소리가 있지 않은가.
소로는 평생 정해진 직장 없이 다양한 일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경제적 불안정은 그를 망가뜨리지 못했다. 소로는 세상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북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울리는 자기만의 북소리를 들으며 살기 위해 투쟁했다. 소로에게도 여러 번 취직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세상과 불화했다. 소로는 미국 하버드대 졸업 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로 돌아와 공립학교 교사로 취직했지만 학생들을 체벌하는 문화에 강력히 반대하며 2주 만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아이들을 때리는 학교에서 그는 가르침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교사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교사처럼 보이기’ 위해 감당해야 할 노동이 더 많은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각종 행정 업무는 물론 ‘말끔하게 차려입기’라는 암묵적인 에티켓이 그를 괴롭혔다. 새 옷을 사는 데 지출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생계를 모색하던 헨리는 측량기사가 되기 위해 독학을 하는데, 이후 측량기사 일은 소로의 가장 믿음직한 수입원이 됨과 동시에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그가 측량을 하는 땅마다 다양한 목적으로 투자와 개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의 측량 이후 자연은 개발되고 인간의 이름으로 통제되고 지배됨으로써 자연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소로와 함께한 나날들’에서 소로의 제자 에드워드 에머슨은 소로를 ‘몽상가’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소로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묘사한다. 하루는 에드워드와 함께 산책을 나가기로 약속했던 소로가 처음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도망치고 있는 노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도망치는 노예를 잡아오면 상금을 주는 잘못된 관행 때문에 당시에는 ‘노예사냥꾼’이 있었는데, 소로는 이 사나운 ‘사람사냥꾼’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흑인 노예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흑인노예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망을 봐주느라,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나가곤 하던 ‘숲의 산책’을 포기한 소로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소로의 제자는 소로의 가슴속에서 울려오던 ‘남들과 다른 북소리’를 진심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당신의 마음 속에만 들리는 ‘자기만의 북소리’를 이해해주는 사람, 그가 당신의 진정한 친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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