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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도 로버트 인디애나도…'하나'로 구현한 예술의 향연

[로비의 그림-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하나銀 30주년 기념작 '하나 로보트'

백남준, 당시 김승유 행장 의뢰로 제작

고장난 ATM·모니터 23개로 CI 형상화

또다른 역작 '시집온 부처'도 로비 밝혀

팝아트 거장 인디애나의 숫자연작 '1'

강렬한 빨강·파랑의 조화로 생동감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에 있는 백남준의 2001년 작 '하나 로보트'. 백남준이 처음으로 기업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한 작품이다.




색색의 풍선들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희고 노랗고, 붉고 푸른 풍선들은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감 때문에 더욱 가볍게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말캉한 풍선이 푹 들어갈 것만 같지만 실제는 육중하고 딱딱한 금속 조각이다. 서울 중구 을지로1가 하나은행 본점 앞을 화사하게 만드는 채미지 작가의 2017년 작 ‘아름다운 몽상가(Beautiful Dreamer)’다. 하늘로 달아나는 수십 개의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 소녀는 풍선 매단 끈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몽글거리며 떠오르려 하는 풍선을 따라 소녀까지도 날아오를 것만 같다. 꿈과 희망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기막히게 역설적이다. 스테인리스스틸로 제작된 풍선 조각은 포도송이처럼 모두 연결돼 있으며 날아오르는 성질이 아니라 툭 떨어질 존재라는 것이다. 중력을 거슬러 이 철 덩어리 풍선을 띄워 올렸다는 점에서 현실의 장벽에 굴하지 않는 예술의 힘이 새삼 드러난다. 가느다란 풍선 줄을 잡고 선 소녀는 역학적으로는 비스듬하게 퍼져 나가는 풍선들의 하중을 분산하는 역할도 한다. 올라가려는 풍선을 붙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풍선이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 존재다. 날아갈 뻔한 꿈을 붙들고, 추락할 듯한 희망의 버팀목이 되고자 하는 양가적 의미를 품고 있다.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앞에 설치된 채미지 작가의 ‘아름다운 몽상가(Beautiful Dreamer)’


하나은행 본점인 을지로 신사옥은 지난 2017년 9월에 준공과 입주가 시작됐다. 건물 밖에는 ‘아름다운 몽상가’ 같은 신작을 뒀지만 내부 로비에는 역사와 인연이 깃든 오래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001년 하나은행이 창립 30주년을 맞아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에게 직접 의뢰해 탄생한 ‘하나 로보트(Hana Robot)’가 대표적이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당시 김승유 하나은행장이 백남준과 경기고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어 특별히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은행은 1971년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비은행 금융기관이었던 ‘한국투자금융’을 모태로 20주년이었던 1991년에 은행으로 전환했고 지금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합병 등으로 몸집을 늘리며 사세를 키운 하나은행은 30주년의 무게와 의미를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냈다.

정문 옆에 위치한 ‘하나 로보트’는 한글 자음 ‘ㅎ’을 변형해 탈춤 추듯 흥겹고 역동적인 형태로 만든 하나은행 CI를 그대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백남준은 앞서 1992년에 뉴욕 브루클린 체이스은행의 요청을 받아 모니터 429개로 제작한 벽화 형식의 비디오 작업을 했는데, 은행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약 10년 뒤 만든 ‘하나 로보트’는 좀 더 유쾌하고 친숙하다. 작품은 고장 난 현금자동입출금기(ATM) 하나와 23개의 모니터로 이뤄져 있다. 모니터 앞쪽에 네온사인으로 붉은 원, 초록과 파랑이 얽힌 곡선을 배치했더니 그대로 하나은행의 CI가 됐다. 당시 작업을 함께한 엔지니어인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여러 기업과 협업했던 백 선생이지만 기업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하나 로보트’가 첫 사례였다”면서 “비디오 조각의 다리 부분이 어색하니 은행에서 사용하던 ATM을 이용하자고 한 것은 내 아이디어인데 백 선생이 흔쾌히 수용해 작품 지지대이자 중심부로 자리 잡게 됐다”고 말했다.



불꽃 형태로 모니터 28개를 배치한 백남준의 2001년 작 '시집 온 부처'가 하나은행 본점 로비를 밝히고 있다.


당시 백남준은 ‘하나 로보트’와 함께 ‘초고속 경제(Economic Super Highway)’도 제작했다. 원뿔 모양의 탑처럼 4개 층으로 쌓아 올린 모니터에서 하나은행을 비롯해 실시간 주가가 끝없이 흘러가는 작품이었다. 제목 그대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초고속 경제를 이야기한 것이며 나선형으로 오르는 형태가 경제 발전을 상징했다. 실시간으로 시황을 송출하는 방식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지금은 진화한 송출 기법이 작품의 시스템을 추월했다. 이 대표는 “그 시절의 새로운 시도가 지금은 커넥팅(연결)도 불가능한 원시인으로 전락한 셈인데 그렇다고 작품을 수술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한동안 하나은행 본점을 지키고 있던 이 작품은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들어선 하나금융TI로 옮겨갔다.

대신 백남준의 같은 시기 또 다른 작품인 ‘시집 온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불상 뒤를 감싼 광배가 확장된 듯한 불꽃 형태의 구조로 28개의 모니터가 배치된 작품이다. ‘부처’는 백남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존재로 동양 사상을 상징하면서도 ‘나를 초월한 나’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아’ 등의 의미를 갖는다. 모니터에서는 주식 정보가 끊임없이 바뀌는데 그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부처는 태연하게 명상하고 있다. 이 작품 말고도 백남준이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때 제작한 ‘마음 심(心)’ 두 점 중 한 점도 하나은행 소장품이다.

로버트 인디애나의 '1(One)'. 작가는 1에서 0까지의 숫자 연작 가운데 ‘1’에 ‘출생’이라는 뜻을 담았다.


숨 가쁘게 변하는 영상을 통해 빠르게 발전하는 현대사회를 드러낸 백남준의 작품과 대구를 이루는 것은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1928~2018)의 숫자 ‘1(One)’이다. 공공 미술 조각 ‘러브(LOVE)’로 유명한 그는 사랑·희망(Hope) 등의 작품뿐 아니라 숫자 연작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어린 시절 21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던 인디애나는 자신이 살았던 집을 기억하기 위해 번호를 매기곤 했는데, 이것이 훗날 숫자를 활용해 제작한 작품 ‘숫자들 1에서 0까지’의 기반이 됐다. 10개의 숫자 작품에 대해 작가는 1은 출생, 2는 유년기, 3은 청년기이며 4는 젊음, 5는 인생의 황금기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6은 황금기, 7은 이른 가을, 8은 가을이며 9는 위험에 대한 주의이고 0은 죽음이라는 특별한 뜻을 담아 각기 다른 색으로 숫자 조각을 만들었다. 하나은행의 ‘하나’와 같은 숫자 1은 역동적인 빨강과 생동감 넘치는 파란색으로 이뤄져 새로운 탄생을 부르는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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