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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ESG 공시법안 난립…기업은 고달프다

■본지·상장사協 공동 254곳 설문…기업 90% "부담 커"

환경·정보보호·재무제표 등

부처별 공시 의무 규제 속도전

"구체 기준없이 혼선만" 지적





국내 코스피 상장사 10곳 중 9곳이 우리나라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 제도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 부처별로 환경·정보보호·재무제표 등 각 분야에서 ‘속도전’식 ESG 공시 의무 법제화를 잇따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으로 공시를 지원해야 할 정부가 체계적이고 거시적인 전략 없이 ESG 정보 공개 규제 양산에만 몰두하면서 자본시장의 혼선을 더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ESG 정보 공개 의무화 관련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88.6%가 “환경정보·정보보호 개별 법률에서 ESG 정보 공개 의무화가 추진되는 상황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번 설문은 상장협이 지난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코스피 상장사 797개사를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 시스템을 통해 실시했다. 이 중 응답한 곳은 총 254개사로 응답률은 31.9%다.

현재 정부는 상장사의 ESG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각종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오는 2025년부터 자산이 일정 규모 이상 되는 코스피 상장사에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 공시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금융 당국은 재무제표에 ESG 관련 정보를 함께 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당장 내년부터 자산 총액 2조 원 이상 상장사는 환경오염 물질 배출량 등을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 9일에는 정보보호 최고책임자를 지정한 상장법인 중 전년도 사업 매출액이 3,000억 원 이상인 기업에 정보보호 공시를 의무화한 정보보호산업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됐다.

기업들은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 등 ESG 공시 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직 국제적으로 제대로 된 공시 기준이 나오지 않아 ESG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을 잡기도 어려운데 투자자들의 비재무 정보 공개 요구는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우용 상장협 정책부회장은 “개별 법률로 ESG 공시를 의무화하면 각 기업의 업종, 규모, 사업 형태 등을 고려하지 못한 채 일률적인 정보 공개를 요구하게 되므로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기후변화에 한정해 법제화를 신중히 논의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법률에 기반한 ESG 정보 공개 제도를 너무 급격히 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이드라인 없는데 자문비만 1억…'레몬마켓' 된 ESG 컨설팅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컨설팅·인증 업계는 ESG 공시와 함께 성장한 시장으로 꼽힌다. 컨설팅 단위에서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공시하려는 기업들에 보고서 작성 방법을 알려주거나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의 ‘신뢰성’을 보장해주는 제3자 검증 업무 역시 활황을 띠고 있다. 대형 회계법인이나 한국경영인증원·한국생산성본부·로이드인증원 등 컨설팅 기관들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기업·학계 안팎에서는 이 같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컨설팅·인증 시장이 최근 질 낮은 상품만 모인 ‘레몬마켓’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아직 ESG 공시 표준·제도가 명확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공시 수요만 폭발하다 보니 가뜩이나 낮았던 가격 투명성이 더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의 제도 정비 등을 통해 보다 명확한 ESG 공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이 같은 시장 왜곡을 방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정작 정부에서는 ESG 공시 규제 생산에 더 몰두하는 모습이라 오히려 기업들의 요구에 역행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16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ESG 정보 공개 의무화 관련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작성을 위해 체계 구축, 작성 대행 컨설팅 및 제3자 검증 명목으로 지출한 총비용은 평균 8,659만 원(32개 사 기준)으로 나타났다. 평균 인증 비용은 1,490만 원(29개 사 기준)으로 집계됐다. 국내 상장사의 ESG 컨설팅·인증 비용 통계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간 ESG 공시 컨설팅·인증 명목으로 1억 원 이상을 지출한 곳은 응답 기업의 50%(16곳)에 달했다. 자산 규모 2조 원 이상 기업의 경우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컨설팅·인증 평균 비용이 9,299만 원에 달했다.

오는 2025년부터 일정 규모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에 대해서는 ESG 공시가 의무화되면서 ESG 컨설팅·인증 비용이 상승했다는 전언이다. 지난 11월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이 글로벌 ESG 표준을 수립할 국제지속가능성기준심의위원회(ISSB) 설립을 발표한 것도 각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작성에 발동을 걸었다. 한 금융사의 ESG 담당 부서장은 “과거에는 컨설팅 관련 업체 10곳이 100개 사를 다뤘다고 하면, 지금은 이들이 200개 사를 담당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된 비용 정보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A 회계법인 임원은 “한 대기업 계열 금융사는 800만 원에 인증을 맡겼다고 하는데 다른 대기업은 1,500만 원에 수주했다는 곳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애초에 국제적으로 명확한 ESG 공시 기준이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컨설팅을 하다 보니 ‘투자자에게 유용한 비재무 정보를 제공한다’는 본취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는 얘기다.

ESG 컨설팅 업계에 만연한 ‘턴키’ 관행으로 인해 보고서 인증 신뢰성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턴키란 보고서 작성 컨설팅 업체들이 다른 컨설팅사에 인증 업무 등의 ‘하청’을 주는 것을 말한다. 재무제표로 치면 재무 컨설팅을 하는 회계법인이 다른 회계법인에 감사 의견을 달라고 일감을 주는 셈이다. 자체적인 윤리 기준을 가진 대형 회계법인들보다는 일반 컨설팅사를 중심으로 턴키 관행이 강하다는 전언이다. 한 회계 업계 관계자는 “돈을 조금만 받고 보고서 도장만 찍어주는 관행이 만연해 회계법인 입장에서는 참여하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시장 왜곡이 결국에는 공시 제도 ‘공백’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컨설팅 용역을 맡기는 것은 어떻게 공시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ISSB에서도 내년에나 ESG 공시 기준 초본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근본적으로는 이 같은 혼선이 제도 도입 극초반 단계에서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만큼 ESG 공시 관행 성숙을 위해 기업 자체적으로 공시 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한 상장사의 ESG 담당자는 “공시 의무화 논의와 함께 작성 기준 및 모범 사례 등에 관한 자료 공유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등으로 ESG 정보가 일원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통일된 기준 없이 각 부처별로 ESG 정보 규제만 생산하고 있어 이에 역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령 환경부는 내년부터 자산 규모 2조 원 이상의 상장사에 환경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환경기술산업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정보 보호 최고책임자를 둔 연 매출 3,000억 원 이상 상장사에 정보 보호 관련 주요 사항을 공시하도록 정보보호산업법 시행령을 바꿨다.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ESG에 대한 내용이 재무제표에 들어가도록 개정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채널에서 공시를 의무화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ESG 공시 실무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개별법으로 정보 공개 의무를 부과하게 되면 ESG 정보가 산발적으로 공시될 수밖에 없어 정보 이용자 입장에서도 접근성이 떨어지고 기업 부담도 커질 것”이라며 “기업 공시 쪽은 금융위원회 소관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관성 측면에서는 맞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中企 "ESG 전담부서 꿈도 못꿔"…대기업과 같은 잣대로 평가 무리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 역량에 격차가 큰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 규모 5,000억 원 미만 코스피 상장사 10곳 중 8곳은 아직 ESG 전담 부서도 꾸리지 못한 상황으로 조사됐다. 조만간 ESG 글로벌 공시 기준이 마련될 예정인 가운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ESG 공시 기준을 별도로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16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ESG 정보 공개 의무화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산 5,000억 원 미만 상장사 중 ESG 전담 부서를 갖췄다고 답한 비율은 응답자의 7.4%에 불과했다. 임시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는 곳도 14%에 불과했으며 아예 관련 부서가 없다고 답한 회사는 78.5%에 달했다.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 중 ESG 전담 부서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56.4%인 것과 대조적이다.

ESG 위원회 설립 여부도 기업 규모에 따라 갈렸다. 예를 들어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 중에서는 ESG 위원회를 설립한 비율이 54.5%였다. 반면 5,000억 원 미만 상장사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3.3%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ESG 위원회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71.9%에 달했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ESG 공시 대응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자체적인 ESG 공시 노하우가 없는 업체들의 경우에는 컨설팅에 따라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 경우 적지 않은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상장협 관계자는 “외부 컨설팅 비용 부담 여력 여부에 따라 ESG 양극화가 심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따라서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심의위원회(ISSB)에서 마련할 예정인 글로벌 ESG 기준을 국내 대·중소기업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만약 IFRS 재단에서 ESG 공시 기준을 마련할 경우 중소기업에 한해 몇 가지 ‘면책 조항’을 넣어주자는 제안이 대표적이다.

한 회계법인 임원은 “단계적으로 대·중소기업 간 다른 접근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아예 IFRS와 별도의 공시 기준을 도입하면 향후 중소기업이 글로벌 ESG 투자 수요에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IFRS 기준 내에서 중소기업에 적합한 내용만 면제 조항을 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기업의 ESG 공시 실무자는 “ESG 공시 역량이 되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플랫폼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도 ESG법제화 신중론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 제도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연합(EU)·미국·일본 등 각국에서 주요하게 논해지는 사안이다. 그러나 해외 ESG 전문 협의체에서도 비재무 정보 규제 도입에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등 국제사회에서도 ESG 공시 제도화에 신중론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16일 금융 투자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기업 협의체인 VBA(Value Balancing Alliance)는 지난 7월 입장문을 통해 “세계적으로 통일된 기준을 만들기 전까지 EU는 특정 표준을 도입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EU는 국제사회 내에서도 ESG 공시 기준 마련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으로 꼽힌다.

VBA는 지속가능성 공시 규준을 표준화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기업 협의체다. 독일 기업 바스프가 의장사를, SK그룹과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가 부의장사를 맡고 있다.

VBA는 “EU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는 기존의 구조를 뛰어넘는 정보를 요구하고 있으나 현재 기업들은 이러한 정보가 없으며 관련 시스템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6월에는 헤스터 퍼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이 5월 하원 의회를 통과한 ‘기업 ESG 공시 및 단순화법’에 대해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는 “ESG는 명확한 경계 및 내부 결합을 정의하기에 부적합하다”며 “많은 ESG 문제는 재무적 중요성과 명확한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SEC에서 의무적으로 공시하는 내용에 포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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