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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전문가'의 몰락

이경권 엘케이파트너스 대표변호사

이경권 엘케이파트너스 대표변호사/사진 제공=엘케이파트너스




수십 명의 모의 환자가 칸막이로 된 진료실에 앉아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등장한 의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 진료 기록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환자의 병명을 진단해야 한다. 1차전 탈락자는 참가자의 절반. 서바이벌 방식의 프로그램 최종 우승자에게는 ‘대한민국 최고 의사’라는 지위와 함께 상금 2억 원이 주어진다. 다른 방송국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변호사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점은 시청자 참여를 도입해 평가에 반영한다는 것이다. 곧 기자들 대상의 프로그램과 교수들의 강의 서바이벌 대회도 개최될 예정이다. 상상의 영역일까, 곧 다가올 미래일까.

몇 년 전 ‘전문가와 강적들’이라는 책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다. 번역으로 순화됐지만 원제는 ‘전문 지식의 죽음(The Death of Expertise)’이다. 왜 이런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출판돼 대중의 관심을 받았을까.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전문가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존중의 정도가 지나친 것이 되레 문제됐을 뿐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문가에 대한 존중이 약해졌다. 심지어 기자는 ‘기레기’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단지 전문가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자칭 비공식 군사 전문가-소위 ‘밀덕’-들이 유튜브에서 군사 전문가 출신의 국회의원을 비판한다. 해당 국회의원의 동영상 조회 수보다 비전문가들이 제작한 동영상 조회 수가 훨씬 많다. 기업의 CEO가 인문학 강의를 하기도 한다.



정보 접근성의 증대, 언론의 문제 등 외부적 요인을 제외한 전문가 집단 내부의 문제점을 짚어본다면 먼저 대중과의 소통을 등한시해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전문가끼리만 회의하고, 학회를 열고, 소통해왔다. 정보의 교류 및 융합을 시도하기보다 정보의 독점을 통한 지식 권력의 독점을 꾀했다. 대중의 이해를 높이려 하기보다 본인의 지적 만족을 위한 글쓰기나 언어 선택이 많았다. 그 결과 대중의 외면과 함께 대중의 언어로 설명해주는 유튜버의 등장을 초래한 것이다.

전문가 집단의 자정 능력 결여도 이유로 들 수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침묵의 카르텔’이다. 소위 ‘쇼닥터’에 대한 자율 기준이 만들어져 심의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심의 정도도 약하다. 이런 상황은 전문가 개인의 자율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의사가 정치 평론을 하고, 변호사가 시사 평론은 물론 예능에까지 출연한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백신에 미생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인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지역 의사회장 출신의 의사가 백신 접종 반대를 외치고 있다. 여러 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법조인이 버젓이 유튜버로 활동하며 돈을 벌고 있는가 하면, 경험 없는 법조인들이 법원이나 검찰의 내부적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시청률은 물론 가성비를 높이려는 언론의 태도도 문제지만 의도를 알면서 동조하는 전문가들도 문제다.

더 이상 개별 전문가의 튀는 행동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의 말이 힘을 갖는 것은 개인적 역량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 전체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사회적 신뢰 때문이다. 그 신뢰에 금이 가고 있는 것 같아 두렵다. 전 세계를 뒤흔든 ‘오징어 게임’의 대사 하나가 생각난다. “제발 그만해. 나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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