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에 따라 글로벌공급망(GVC) 재편이 빠르게 이뤄지는 가운데 배터리와 자동차·반도체 등 국내 주력 산업의 해외 투자도 미국과 유럽으로 쏠리고 있다. 반면 지금까지 해외 대표 생산 기지로 자리매김하던 중국의 매력은 눈에 띄게 떨어지는 모양새다.
27일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국내 기업의 미국 직접투자 규모는 174억 2,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9.3% 급증한 반면 중국은 31억 6,000만 달러로 8.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 같은 추세는 앞으로 더 심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참을 선언하면서 올해 발표된 주요 투자 계획이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 집중돼서다. 특히 첨단 기술 중심의 고부가가치 주력 산업에서 이 같은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배터리 3사는 향후 3~5년 내 미국을 중심으로 총 20조 원에 달하는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본지가 분석한 결과 미국에서 이뤄지는 투자 규모가 약 12조 7,000억 원으로 63%의 비중을 차지했다. 그 뒤를 중국(4조 2,000억 원), 유럽(2조 2,000억 원), 한국(6,400억 원) 순으로 이었다. 특히 LG엔솔과 SK온이 대규모 미국 투자에 나서기로 했다. LG엔솔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스텔란티스와의 합작 투자를 확대하고 SK온은 포드와의 합작 공장 설립에 나선다. 이와 관련해 SK온은 테네시주와 켄터키주에 3곳의 공장을 세우는 데 5조 1,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LG엔솔도 GM·스텔란티스와의 합작 공장 등을 설립하는 데 향후 3년간 총 5조 6,000억 원을 투자할 방침이다. 미국에서는 친환경 정책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올해 초 출범하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의 미국 투자에 힘이 실렸다. 유럽 투자도 확대한다. LG엔솔은 향후 3년간 유럽 지역에 1조 2,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SDI는 올해 초 유상증자·채무보증 등의 방식을 통해 약 1조 원을 헝가리 공장 증설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투자 규모가 미국에 비해 훨씬 작은 것은 한국 배터리 3사가 일찍 개화한 유럽 전기차 시장에 대비해 비교적 이른 시점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SK온이 약 3조 원을 투입해 4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전체 규모에서 서방국가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친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배터리 시장은 CATL·비야디 등 현지 업체가 장악하고 있어 투자에 따른 실익이 낮다”고 설명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오는 2025년까지 미국 내에 전기차 생산 시설을 갖추기 위해 8조 8,000억 원(74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최근 미국 현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오는 2030년까지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에 대응해 전체 판매량의 50%를 전기차로 채울 것”이라며 “미국 내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해 여러 선택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유럽 현지에서의 인기를 이어나가기 위한 투자도 진행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GM으로부터 인수한 러시아 슈사리 공장에서 현대차 투싼·팰리세이드와 기아 스포티지를 생산하기 위해 투자 금액을 2,571억 원(160억 루블)에서 8,484억 원(528억 루블)로 늘렸다. 다만 세계 최대의 전기차 시장인 중국에 대한 투자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정기 인사에서 중국 사업을 총괄하던 이광국 사장 자리에 이혁준 HMGC 전략기획담당 전무를 앉히고 GV70 전동화 모델을 중국 광저우 모터쇼에서 공개하는 등 중국 공략 행보를 보이고 있으나 구체적인 신규 투자 계획을 밝히지는 않았다.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2공장 구축에 170억 달러(약 20조 원), SK하이닉스가 실리콘밸리 인공지능(AI) 낸드솔루션 연구개발(R&D) 센터 10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을 각각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중국의 경우 눈에 띄는 발표 없이 기존 공장에 대한 개보수와 앞서 계획된 투자 집행 정도만 진행하고 있다. 과거 삼성전자가 중국 시안에, SK하이닉스가 우시와 충칭에 생산 시설을 늘리며 적극적인 투자를 벌인 것과는 대조적인 흐름이다. 특히 미국이 반도체를 전략 산업으로 분류해 첨단 공정 장비의 중국 반입을 제한하는 만큼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중국 투자 규모도 제한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봉만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협력실장은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에 기초해 배터리와 반도체 등 공급망 재구축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한국 기업의 직접투자가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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