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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한중일 3국3색 궁궐… 우주의 중심을 지상서 만나다

●'왕조의 정수' 경복궁

북악산·인왕산 배경으로

엄격한 유교의 질서 구현

●'황제의 과시욕' 자금성

전통시대 궁궐로 규모 압도

붉은벽·노란지붕 시선집중

●'군주의 소박함' 교토고쇼

'자신전' 유명무실 천황 대변

일왕 지금도 가끔 찾아 머물러

서울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늠름하게 서 있다. 경복궁은 왕조 제도의 상징이자 모범이 되고자 했다.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은 절대적인 황제 권력을 바탕으로 그 규모에서 사람들을 압도한다.


일본 전통 시대 수도였던 교토. 교토고쇼의 정전인 자신전은 유명무실했던 천황의 소박한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3국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각국의 궁궐이다. 한국의 경복궁(景福宮)과 중국의 자금성(紫禁城), 일본의 교토고쇼(京都御所·경도어소) 등이다. 모두가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을 지상에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지만 각국이 처한 상황으로 다르게 표현됐다. 경복궁은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다. 임금이 사회제도의 모범이라는 유교를 정점으로 한 조선 왕조의 정수를 보여준다. 자금성은 권력을 최대한도로 집중시켰던 중국 황제의 과시욕을 볼 수 있다. 교토고쇼는 이름은 황제, 즉 ‘천황’이지만 실권은 없었던 일본 군주의 소박함을 이미지화했다. 면적 기준으로 경복궁이 43만㎡, 자금성이 72만㎡, 교토고쇼는 11만㎡ 규모다.

◇베이징의 자금성=베이징 자금성은 전통 시대 궁궐로는 역사상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자금성에 들어서면 그 규모가 압도한다. 개별 건물들의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붉은색 벽과 노란색 지붕의 선명한 대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금성은 원래 명나라 초기인 1421년에 완공됐다. 불에 잘 타는 목조건물의 단점으로 수많은 화재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17세기 중반 명나라가 붕괴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자금성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탔다. 이후 재건됐는데 전통 중국 한족 형태가 아닌 만주족 양식이 상당 부분 첨가됐다.

자금성에는 유교 외에 도교·불교와 함께 샤머니즘을 도입했고 건물 형태에도 반영돼 있다. 다행히도 그후로는 대규모 전쟁으로 피해를 겪지 않아 현재 건물들은 거의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

자금성은 12m 높이의 성벽과 52m 폭의 해자로 둘러싸여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성곽’처럼 보인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태화전(太和展)이다. 자금성의 정전으로 주요 행사가 열렸다. 거대한 태화전과 태화전광장이 바로 중국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건청궁은 황제의 침소, 곤녕궁은 황후의 침소다.

◇교토의 교토고쇼=1868년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일본 천황의 궁궐이었던 곳이 교토고쇼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거처를 ‘고쇼(御所)’라고 부르는 데 현재의 도쿄고쇼(황거)와 대비해 교토고쇼로 불린다. 일본은 1000여 년 동안 교토가 수도였다. 메이지유신으로 수도가 도쿄로 옮겨졌다.

교토고쇼가 주는 느낌은 중국의 자금성이나 한국의 경복궁과는 다르다. 여전히 왕정 국가인 일본에서 일왕이 가끔 교토를 방문하고 교토고쇼에 머물기 때문이다. 교토고쇼는 아직 살아 있는 느낌을 주고 또 일반인 방문도 다소 엄격하다.



교토고쇼는 자금성이나 경복궁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교토고쇼의 정전인 자신전(紫宸殿)을 보면 알 수 있다. 교토고쇼 최대의 건물로 자금성의 태화전,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역할을 했다. 주 건물이 있고 앞은 넓은 광장으로 이뤄져 있다.

다른 점은 쓰임새다. 역대로 일본에서 천황은 유명무실한 존재였기 때문에 실제 자신전에서 정치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교토고쇼에서 천황이 신하들과 정치를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전 마당에 있는 귤나무와 벚나무는 문무 관리를 대변한다고 하는데 실제 관리들이 이곳에 도열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대규모 화제를 겪고 재건된 1855년의 모양새라고 한다. 자신전의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노송나무 껍질로 덮혀 있다. 자신전의 최대 행사는 1868년 3월 14일 메이지유신 선포였다.

◇서울의 경복궁=경복궁이 완공된 것은 조선 왕조가 창건된 직후인 1395년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하는데 건축 순서로는 경복궁이 먼저다. 다만 경복궁이 중국 고대의 궁궐 건축 양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두 곳이 서로 비슷하게 됐다.

경복궁을 만든 조선의 건국자들은 엄격한 유교 질서를 구현한 경복궁이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회제도의 모범이 되길 바랐다. 경복궁에는 대형 행사가 열리는 정전인 근정전(勤政展)을 축으로 임금이 일상 업무를 보는 편전(사정전), 임금의 침소(강녕전), 왕비의 침소(교태전)가 분명히 구분돼 있다. 여기에 뒤쪽의 북악산과 인왕산이 주는 배경 효과까지 더해졌다.

경복궁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는 1888년 경복궁 중건 때의 상태를 목표로 재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원래 500여 동이었던 건물은 1990년 당시에는 36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2010년까지 89동을 복원했고 다시 2045년까지 80동을 추가 복원해 최종적으로 205동의 건물을 완성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원래 건물의 40%밖에 되지 않는다.

◇우주의 중심을 지상에=자금성과 경복궁, 교토고쇼는 아시아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기 때문에 비슷한 점도 많다. 전통 시대 우주의 중심인 별자리를 ‘자미원’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지상의 궁궐에도 반영됐다. 자금성은 이름부터 자미원의 ‘자(紫)’를 사용해 지상의 중심임을 자처했다. 물론 경복궁과 교토고쇼도 지지 않는다. 경복궁 강녕전 뒤쪽으로 경복궁의 중앙에 ‘자미당(紫微堂)’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아쉽게도 일제강점기에 철거됐고 현재 복원 중이다. 교토고쇼 정전의 이름 자신전에도 ‘자’ 자가 들어가 있다.

이와 함께 경복궁의 왕비 침소 이름은 교태전(交泰展)인데 자금성에도 같은 이름의 건물이 있다. 경복궁과 자금성 북문 이름은 모두 신무문(神武門)이다. 경복궁 근정전광장 앞 문인 근정문의 동서 소문 이름은 일화문(日華門)·월화문(月華門)이고, 교토고쇼 자신전광장의 동서 문도 일화문·월화문이다. 자금성 건청궁광장의 서쪽 문은 월화문이고 동쪽 문은 이름을 조금 바꿔서 일적문(日積門)이다.

/서울·베이징·교토=글·사진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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