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총액이 1조 원이 넘는 중견 제조 업체인 A사는 올해 주주총회를 앞두고 주식 1주를 들고 있는 소액주주로부터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전체 주주의 명단과 소유 주식 수, 주소를 내놓으라는 것. 알고 보니 소형 로펌이 뒤에 있었다. 상장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목적이나 주식 숫자에 상관없이 상법상 주주명부 열람권을 앞세워 주주명부를 통째로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상황에 처하자 속앓이를 하고 있다.
7일 서울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반도체 장비 회사 B와 로봇 제조사 C사, 제약사 D사 등도 3월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한 소형 로펌으로부터 주주명부 열람 요청을 받았다. 이 로펌이 보유한 이들 기업의 주식은 단 1주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법인이 이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은 상법 396조에 규정된 주주명부 열람권 때문이다. 주식 수나 명분에 상관없이 주주라면 누구나 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회계장부 열람·등사 청구의 경우와 달리 청구를 하는 데 있어서 갖춰야 하는 형식을 별도로 정하고 있지 않다.
A사의 한 관계자는 “경영권 분쟁과 같은 일이 없는데도 주주명부를 요청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주주 개인 정보를 이용해 영업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주명부에는 주주의 이름, 주소, 주식의 종류, 주식 수, 취득일 등 각종 개인 정보가 담겼다. 무분별하게 열람·등사하는 경우 개인 정보 유출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미국·영국 등은 주주명부를 요청하는 경우 어떤 목적으로 요청하는지 분명히 밝히도록 하고 있다. 일본 회사법에 따르면 △회사의 업무 수행 방해 △주주명부 열람을 통한 이익을 얻으려고 할 때 △과거 2년 내 주주명부 열람으로 이익을 얻은 전례가 있을 때 등의 경우에는 기업이 주주명부 열람 청구를 거절할 수 있다. 미국은 정보 제공에 동의한 주주의 정보만 열람이 가능하다.
무분별한 주주명부 열람 청구가 이어지면서 상법 개정에 대한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코스닥협회는 이달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회사가 열람·등사를 거부할 수 있도록 거부 사유를 신설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장경호 코스닥협회 회장은 “상장회사의 경우 주식을 취득한 후 곧바로 주주명부 열람·등사청구를 하고, 이를 개인적·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한 후 다시 이를 처분하는 식으로 권리를 악용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정당한 목적이 아닌 회사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 거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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