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수십만명의 러시아 고급 인력이 “이웃과 전쟁하는 나라에서 살 수 없다”며 고국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1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시아 비영리 단체 ‘오케이 러시안즈’는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30만 명의 인력이 러시아를 떠났다고 밝혔다.
이들은 주로 IT(정보기술), 과학, 금융, 의료 종사자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터키 등지로 향했다고 WSJ는 전했다.
문제는 이 인력이 러시아 경제를 이끄는 핵심이라는 점이다. 국제금융협회(IIF)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출국했거나 출국을 계획 중인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젊은 세대"라면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달 말 기준으로 러시아에서 최근 급부상한 분야인 IT 산업에서만 5만~7만 명이 이미 고국을 등진 것으로 집계됐고 이달 중에는 10만 명이 추가로 떠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이 중 일부는 아예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를 이전하거나 동료와 동반 출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유치원생 수학 공부 앱을 공동 개발한 사샤 카질로는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했는데, 앱 개발자 15명 가량을 포함해 사업체도 이전할 계획이다.
그는 남편이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다 13일간 구금된 것이 출국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WSJ에 말했다. 그는 "모든 게 악몽이었고, 우리는 깨어나야만 했다"면서 "전쟁 전이라면 나도 러시아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환상을 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항공사인 아예로플로트에서 부사장을 지낸 안드레이 파노프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열흘 만에 사직서를 내고 러시아를 떠났다. 이스라엘에 머무는 중이라는 그는 "국영 기업에서 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 IT 기업인 얀덱스에서는 최고경영자(CEO) 엘레나 부니나는 임기 만료를 2주 앞두고 사내 공개 메시지를 통해 “이웃과 전쟁을 벌이는 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밝히고 조기 사임했다. 이어 프로그래머를 포함해 수십명의 얀덱스 직원이 러시아를 떠났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가뜩이나 서방의 제재 등으로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이 올해 러시아 경제가 10%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하는 등 러시아 경제엔 먹구름이 드리운 상태다.
러시아에서 이 같은 규모의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진 것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 당시 고등 교육 중산층과 고위층 등 수백만명이 러시아를 떠난 이후 처음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카고대 교수인 콘스탄틴 소닌은 "초기 엑소더스가 불과 몇 주 사이에 일어났다"면서 "러시아에서 이런 집중적 이민 행렬이 나타난 것은 100년 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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