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대학이나 공공 연구소에서 특허·논문에 대해 ‘양보다 질’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양에만 집착한 것처럼 정부와 정치권은 하나같이 규제 혁파를 외치다가 되레 규제만 쏟아냈어요. 경제·안보 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제는 규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위한 정치적 결단과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야 합니다.”
천세창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만(차관급)은 15일 서울 남대문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과학기술 패권 전쟁 이후 주요국의 기술주권 전쟁이 불붙고 있다”며 “진정으로 혁신 산업과 전략 기술을 키우려면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열거한 규정만 금지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발상의 대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밝혔다. 역대 정권마다 ‘규제 전봇대를 뽑겠다’ ‘규제는 쳐부술 원수이자 암 덩어리다’ ‘붉은 깃발을 치워야 한다’며 규제 혁파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지만 오히려 규제가 갈수록 늘어났다는 것이다.
특허청 차장 출신인 그는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산업 융합 촉진을 저해하는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하는 데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현재 12개 분과에 150여 명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옴부즈만실을 이끌며 전기차, 수소차, 개인 모빌리티 분야의 규제 혁파 로드맵을 수립한 데 이어 반도체, 디스플레이, 바이오헬스, 에너지, 미래 이동 수단 등의 산업에 대해 연구개발(R&D) 단계에서부터 규제 이슈를 도출해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새 정부는 역대 정권처럼 초기에 규제 혁파를 외치다가 중·후반에는 오히려 규제를 크게 늘리는 ‘되돌이표’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키를 쥐고 있는 정부가 부처별로 국회 입법 없이 시행령과 규칙으로 규제를 양산하고 있고 규제영향평가(규제에 따른 비용·편익 계산)를 받지 않는 정치권의 의원입법 규제는 정부 발의 규제의 8배나 될 정도로 많아 국가적으로 각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시행령과 규칙으로 만든 규제가 전체 규제의 86.9%(5038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단 3.6%(210건)만이 규제개혁위원회의 본심사를 거쳤을 뿐이다. 시행령·규칙에 따른 정부 규제 비율은 이명박 정부(73.8%), 박근혜 정부(77.9%)보다 높은 수준이다. 천 옴부즈만은 “갈수록 규제 심사가 부실해졌다는 뜻”이라며 “규제 혁파만 선언적으로 외치는 바람에 총론만 있고 대안 제시와 해결 방안 등 각론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미국의 가파른 금리 인상 추세,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 우려 속에 규제 혁파를 통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꼭 필요한 규제만 하도록 해 기업 활성화와 민생 편익을 증가시키는 데 차기 정부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허와 논문의 경우에도 옥석을 가려 질적 관리를 통해 기술 사업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과제인 것처럼 규제도 마찬가지”라며 “식품·안전·의료·환경 등 꼭 필요한 규제만 하는 식으로 규제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동안 기업들은 일률적인 주 52시간 근로제와 최저임금제, 중대재해처벌법, 파업 시 대체근로 금지 등 문재인 정부의 노동 규제 등에 대해 불만을 토로해왔다. 국가전략기술의 하나인 반도체 경쟁력을 향상하기 위한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추진도 규제 등으로 인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
그는 규제 혁파 전략과 관련해 “정부와 국회에만 맡겨놓으면 앞에서 하나의 규제를 풀고 뒤에서는 오히려 두 개의 규제를 만들어내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더 이상은 안 된다”며 “경제6단체가 출자하거나 민관이 합동으로 (가칭)규제혁신재단을 만들어 기업 입장에서 모든 규제를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불필요한 규제들을 빼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혁신 산업의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전환 같은 담대한 규제 혁파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권도 국회입법조사처에 규제정책실을 신설해 더 이상 기업 활동을 옥죄는 규제를 양산하는 일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 미국은 2000년대 초반 ‘특허 괴물’ 문제가 산업계에서 부각되자 의회에서 10여 년에 걸쳐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업계, 대학과 공공 연구소, 중소기업, 개인 발명가 등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2011년 사회적 이해 갈등 조정 등 혁신 활성화를 위한 특허법을 개정했다.
요즘처럼 과학기술 패권이 경제·안보를 좌우하는 기술주권 시대가 도래해 그야말로 규제 패러다임을 대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혁신 산업의 경우 ‘사전 허용-사후 규제’나 ‘원칙 허용- 예외 금지’ 방식의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하되 감독 기능을 강화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징벌 배상을 하는 쪽으로 규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혁신 산업에 도전하고 모험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규제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며 “기존 사업자와 충돌이 발생할 경우 신규 사업자가 일정 부분 기존 사업자를 지원하거나 기존 사업자가 신규 사업자로 전환하도록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이어 “김영삼 정부 이후 30년간 규제 혁파를 국가적 어젠다로 외쳐왔지만 여전히 ‘규제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된다”며 “이제는 찔끔찔끔 소극적으로 규제 문제에 접근해서는 더 이상 국가의 생존마저 담보할 수 없는 기술주권 시대가 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 옴부즈만은 “미국의 4차 산업혁명 관련 신제품과 신서비스가 우리 제도와 규제 환경에서는 단 ‘1%’만 합법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라며 “과학기술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규제 혁신 행정을 잘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톱 100 스타트업의 비즈니스 모델 중 한국에서 제대로 꽃피울 수 없거나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53%가량에 달한다는 아산나눔재단의 보고서(2019년)도 소개했다.
그는 미중 과학기술 패권 전쟁의 전망과 한국의 전략적 선택에 대해서도 상세히 피력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 경제는 이미 보완 관계가 아닌 경쟁 관계다. 중국은 전기차·배터리·디스플레이 등에서 선두권이고 바이오·드론도 우리를 한참 앞서 있으며 우주항공은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강국”이라면서 “한중이 반도체·배터리 등 모든 분야에서 경쟁하는데 우리가 앞선 것은 실상 반도체가 유일하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미국·유럽·일본에 동시 등록된 ‘삼극 특허’ 등 특허의 질적 측면에서 보면 미국이 상당히 앞서지만 중국은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등 10개의 전략기술 중 9개 분야에서 특허출원 1위(2020년 기준)를 기록했다”며 경각심을 촉구했다. 따라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安美經中)’이라는 전통 프레임에서 벗어나 AI, 바이오, 반도체, 양자 기술, 우주항공 등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이 조선 분야에서 쫓아오자 우리가 재차 디지털로 앞서나가며 조선 시장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며 “반도체·배터리 등 주력 산업의 초격차 전략을 강화하고 바이오, AI, 양자 기술 등 경쟁형·추격형 분야는 산학연이 합심하고 국가 R&D 시스템을 대혁신해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범국가적 혁신 문화와 생태계 구축, 신산업·신기술 규제 혁파, 디지털 대전환과 소프트웨어 힘 강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 대학과 출연연의 기업가 정신 함양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벤처·스타트업이 경제 혁신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인수합병(M&A) 시장 활성화가 필요하다”며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입버릇처럼 ‘임자 해봤어’라고 얘기했는데, 사회적으로 모험 정신을 고취하는 게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천 옴부즈만은 “청년이 스타트업에 도전하고, 대학과 출연연의 연구자가 도전 정신을 갖고 임팩트 있는 연구를 하고, 산학 협력에 나서고, 창업할 수 있도록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이 망해도 특허를 팔아 재도전이 가능한데 우리도 혁신 국가를 만들려면 규제 혁파와 특허 전략이 모두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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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전북 전주 △서울대 조선공학과 △충남대 특허법무 박사 과정 수료 △상공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사무관 △특허청 특허심사관·특허심판관 △특허법원 기술심리관 △특허청 산업재산정책과장 △2010년 특허심판원 심판장 △2015년 특허청 특허심사기획국장 △2018년 특허법원 사법행정자문위원 △2019년 특허청 차장 △2021년~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만(차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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