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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외교도 리셋이 필요하다

신경립 국제부장

뒤늦게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文정부

마지못해 서방 편 섰다는 인상 남겨

젤렌스키 국회연설에 의원들 '심드렁'

국제사회서 책임감있는 행동 보여줄때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현지 시각) 이라크의 최정예 공화국 수비대가 쿠웨이트를 기습 공격했다. 냉전 종식으로 세계가 화합에 대한 기대에 찬 시기에 벌어진 침략 전쟁에 국제사회는 무력 응징으로 대응했다. 전쟁은 미국이 이끄는 다국적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 세계는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맞았다.

‘걸프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동북아 정세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세계 2위 경제 강국이던 일본은 평화헌법을 이유로 연합군에 참여하는 대신 거액의 지원금을 내놓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총 전쟁 비용의 20%를 댄 일본에는 ‘수표 외교’라는 조롱 섞인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일본 외교는 ‘걸프 트라우마’라는 뼈아픈 상처를 안게 됐다.

이후 일본의 외교안보 전략은 크게 달라졌다. 국제사회에 기여해 인정받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은 빠르게 평화헌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 4월 해상자위대 함정을 걸프만에 파견했고, 이듬해에는 자위대가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국제평화협력법(PKO법)을 제정했다. 동북아 국가들은 경악했지만 일본은 그렇게 군사 활동의 물꼬를 트며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키워갔다.

2022년, 세계는 또 한 번의 침략 전쟁을 목도하고 있다. 2월 24일 새벽 5시 50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공식 선포했고 우크라이나는 이내 화염에 휩싸였다.

전쟁의 향방은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글로벌 정세에 막중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고 있다. 30년간 미국이 쌓아온 국제 질서가 깨지고 미국과 서방,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세력의 신냉전 시대의 막이 열리는 신호탄이 됐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일본의 행보는 유독 눈에 띈다. 걸프전 당시 의료 장비 지원도 꺼렸던 일본은 우크라이나에 자위대 헬멧과 방탄조끼를 보냈고 자위대 수송기 파견까지 검토 중이다. 전직 총리의 입에서는 ‘핵 공유’ 발언까지 나왔다. 누구보다 신속하게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에 앞장서고 머뭇거리는 아시아 국가들을 설득하는 역할도 자처한다. 한국 입장에서 눈꼬리를 치켜뜰 일이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맞춰 일본이 스스로 국제 무대의 중요한 플레이어임을 자처하고 이를 주저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방의 시선도 우호적이다. 지난달 24일 유럽연합(EU)과 주요 7개국(G7),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긴급회의가 열린 벨기에 브뤼셀에 아시아 정상으로는 유일하게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본이 ‘서방의 일원이자 파트너’로서의 독보적인 역할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줬다. 미국의 외교 전문 매체 디플로맷은 일본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에서의 역할을 ‘리셋’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이제 ‘걸프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번 전쟁을 군사력과 외교 역량 도약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 중대한 시기에 한국은 보이지 않는다. 정권 교체기인 탓도 있겠지만 5년 내내 ‘헤징’ 외교로 빈축을 샀던 문재인 정부는 이번 전쟁에서도 뒤늦게 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마지못해’ 서방의 편에 섰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고 정권 탓만 할 수도 없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국회 화상 연설에 국회의원들이 보인 무성의와 결례는 한국 정치인들이 당파를 막론하고 국제 이슈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국제사회의 기류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국제사회가 더 많은 참여를 요구할 때 우리는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단호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이제 당선자로서의 ‘말’의 시간이 끝나고, 대통령으로서 보여줄 ‘행동’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국 외교는 리셋이 필요하다. 머뭇거리다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국의 트라우마로 남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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