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22일(현지 시간) 4년 만에 터키를 방문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 자말 카슈끄지 사망 사건 이후 국제사회에서 외면받던 산유국 사우디가 글로벌 에너지 공급난과 경기 침체 위기로 몸값이 오르자 이를 기회로 삼아 외교 입지를 넓히는 모양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이날 빈 살만 왕세자가 2018년 이후 처음으로 터키를 방문해 에르도안 대통령과 에너지·안보·금융 분야 협력과 교역·투자 진척 등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양국이 회담 후 낸 공동성명에서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겠다는 결의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번 회담에 대해 내년 6월 대선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를 경제 위기의 돌파구로 삼기 위해 오랜 갈등 청산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터키는 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70%를 돌파하고 달러 대비 리라화 환율이 지난해 초 7리라 초반 수준에서 현재 17리라까지 오르는(리라화 가치 하락) 등 극심한 인플레이션 압박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한 지지율 하락에 고전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의 자금력을 등에 업고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는 것이 외신의 평가다.
앞서 양국 관계는 2018년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인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사우디 요원들에게 살해되며 급격히 경색됐다. 당시 터키는 피살 사건이 '주권 침해’라며 사우디를 비난하고 빈 살만 왕세자를 배후로 의심해 궐석재판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4월부터 터키 법원은 사우디에 해당 재판을 이관하기로 결정하고 에르도안 대통령도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포옹하는 등 터키 측이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 의향을 내비쳤다. 이에 빈 살만 왕세자가 4년 만의 해외 순방 때 이집트·요르단에 이어 터키를 방문하며 화답한 것이다.
사우디와의 관계 복원에 나선 것은 터키뿐이 아니다. 그간 사우디 왕실에 강력하게 카슈끄지 피살 사건의 책임을 물어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다음 달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지역을 찾아 유가 폭등 문제를 논의하고 증산을 요청할 계획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치적 의도로 인권 문제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카슈끄지의 약혼녀 하티스 첸기즈는 이날 “해외 순방으로 정당성을 얻는다고 해도 (왕세자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터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 지도자 케말 킬리츠다로을루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금전적 지원을 국가의 명예와 맞바꿨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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