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이재명 꼼수 방탄’을 보면서 조지 버나드 쇼의 명언이 떠올랐다.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는 17일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하도록 한 당헌 80조 1항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 대신에 ‘정치 탄압 등이 인정되면 윤리심판원이 징계를 취소할 수 있다’는 80조 3항을 수정해 징계 취소 주체를 외부 인사가 주도하는 윤리심판원에서 당무위원회로 바꾸기로 했다. 이재명 의원이 당 대표가 된 뒤 기소되더라도 지도부 뜻에 따라 직무 정지를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둔 것이다. 비판 여론의 눈치를 보는 척하면서도 뒷문을 열어둔 것이다.
3·9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석패한 이재명 후보는 곧바로 6·1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이어 8·28 민주당 대표 경선에 출마해 78% 넘는 득표율로 독주하고 있다. 이러니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 ‘확대명(확실히 대표는 이재명)’ 등의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차기 대선까지 4년 6개월 넘게 남았으므로 성찰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의원은 기존 정치 문법을 벗어나 과속 주행하고 있다.
숨 가쁘게 서두르는 데는 절박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분위기가 사라지기 전에 당권 쟁취를 발판으로 차기 대권 후보 자리를 굳히려는 계산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법 리스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속내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이 의원은 대장동·백현동 개발 특혜, 부인의 법인카드 유용, 성남FC 불법 후원금, 변호사비 대납 의혹 등 10여 개 의혹으로 검경의 수사를 받고 있다. 이 의원이 ‘방탄조끼’인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갑옷’인 당 대표로 선출되고 당헌 80조 개정까지 이뤄진다면 ‘3중 방탄’이 완성되는 셈이다. 당내의 저항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친명(親明) 세력은 극성 지지층인 ‘개딸(개혁의 딸)’들을 동원했다. 개딸들이 소극적인 의원들을 ‘수박(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규정해 융단폭격을 가하는 바람에 “문자 폭탄이 양념을 넘어 주재료가 됐다”는 탄식도 나온다.
‘급행열차’를 탄 이 의원을 보면 대선에서 연거푸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데자뷔를 느끼게 된다. 이회창 후보는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득표율 1.6%포인트 차이로 졌다. 8개월 뒤인 1998년 8월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됐다. 이어 1999년 서울 송파갑 국회의원 보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는 야당 당수였던 시절 대선 주자 지지율에서 선두였고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4년여 동안 ‘여의도 대통령’ ‘거의 대통령’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했다. 이회창 후보는 2002년 대권에 또 도전했으나 2.3%포인트 차이로 노무현 후보에 밀렸다.
재보선 당선과 당권 장악 등의 스케줄을 보면 이회창과 이재명은 닮은꼴이다. 두 사람은 이념·노선에서는 구별되지만 사법 리스크 또는 가족의 도덕성 논란 등으로 외연 확장에서 한계를 보였다. 이재명은 부인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으로 곤욕을 치렀고 이회창은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 등으로 타격을 입었다.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김대중·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재명과 다른 길을 걸은 뒤 결국 대권 고지에 올랐다. 두 사람 모두 몇 년 동안 휴지기를 거친 뒤 당권을 잡은 데다 하늘이 도울 정도의 특수 상황을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DJP 연대’, 보수 분열, 외환 위기 등 유리한 여건을 맞아 승리했다. 문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보수 후보 난립 속에서 당선됐다. 친명 세력은 “이회창이 아니라 DJ 길을 걸을 것”이라고 최면을 걸고 있다. 그들은 ‘1%포인트 표만 더 얹으면 정권을 되찾아올 수 있다’면서 무리수를 두고 있다. 하지만 팬덤 정치의 ‘방탄복’까지 껴입고 무한 독주의 길을 가고 있는데 지지층을 더 넓힐 수 있을까.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박빙의 차로 패배한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석열 정권에 ‘야당 복(福)’만 안겨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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