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볏짚 인간들이 움직이자 등에 짊어진 검은 원탁이 기울어진다. 그 위에 놓였던 둥근 볏짚 뭉치 하나가 데구르르 구른다. 둥글게 어깨 맞대고 선 이들은 머리 하나 제대로 갖지 못 하는, 방향상실의 군중이다. 잘린 목이 봉두난발 같은 볏짚 인간은 총 열 여덟이다.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순간 파르르한 근육의 떨림 같은 긴장감에서 최우람(52) 특유의 ‘기계 생명력’이 느껴진다. 신작 ‘원탁’이다.
현대자동차가 국립현대미술관(MMCA)을 후원해 매년 중진작가 한 명(팀)의 신작 개인전을 선보이는 ‘MMCA 현대차(005380) 시리즈’ 올해 작가로 선정된 최우람의 개인전 ‘작은 방주’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신작 49점을 포함한 총 53점이 선보였다. 미술관 내부 중앙홀 격인 서울박스에 놓인 ‘원탁’은 천장 쪽에서 새 3마리가 빙빙 도는 ‘검은 새’와 짝을 이룬다. 머리 하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앉았다 일어나기를 끝없이 계속하는 ‘원탁’ 아래 밀짚인간과 달리 검은 새는 여유롭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머리를 통째로 낚아챌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전시 하이라이트는 5전시실 안쪽에 자리 잡은 ‘작은 방주’다. 세로 12m의 거대한 배 형태다. 물이 없어 뜨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배에 반대쪽으로 ‘두 선장’이 앉았다.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하나. 양쪽 35쌍 노의 현란한 움직임은 무용수의 몸짓처럼 아름답다. 주목할 것은 선체 중앙에 놓인 5.5m 높이 ‘등대’다. 야간에 불을 밝혀 항로를 알려주는 게 등대이건만, 배 안의 등대는 더이상 불변의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등대 조명은 길잡이가 아니라 감시자 같다.
최우람은 1990년대 초부터 정교한 설계의 기계로 움직임과 서사를 보여주는 ‘기계생명체(anima-machine)’를 선보여 왔다. 생명체의 본질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과 기술 진보에 의한 기계 문명에 인간 욕망이 집약됐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약 30년간 기계로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며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져온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는 시대상황을 보여주며 위로와 응원을 전한다. 최 작가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과거 천연두나 페스트가 퍼질 때와 다를 바 없는 팬데믹 상황을 지나면서 2022년 인류에게도 방주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방주에 누가 탈 것인지 선택이 필요하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모든 것을 실을 수 없다는 게 자명하기 때문에 ‘작은’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작다”지만 작가 평생의 최대 규모 작품이다. 들숨 날숨과 비슷한 속도로 활짝 피었다 오므라들기를 반복하는 꽃 모양 작품 ‘하나’와 ‘빨강’은 코로나 의료진의 방호복 재질과 같은 타이벡 섬유로 만들어졌다. 폐차될 자동차에서 분리한 전조등과 후미등을 각각 작은 행성처럼 만든 구작 ‘URC’ 연작도 만날 수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번 전시에 대해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열망은 기계를 통해 실현됐고, 최근 인공지능과 로보틱스 등으로 확장된 모빌리티는 인간과 기계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면서 “전지구적 위기를 넘어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지금, 인간과 기계를 공생과 동반의 관계로 보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방향과 더욱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현대자동차그룹 로보틱스랩이 기술 자문으로 참여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2014년부터 10년 프로젝트로 ‘MMCA 현대차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최대 후원기업이 됐다. 이불을 시작으로 안규철·김수자·임흥순·최정화·박찬경·양혜규·문경원&전준호 작가가 선정됐고 제작비와 제작공간의 제약 없이 신작에 도전해 관객과 공유했다. 전시는 내년 2월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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