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를 입안한 이형구(사진) 전 노동부 장관이 24일 오후 6시 40분께 여의도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김영삼 정부가 전면 실시했지만 사실 정책 자체는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2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1982년 고인이 재무부 이재국장과 제1차관보를 지내면서 입안한 것이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보성고등학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었다. 1978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9년 외자계약심의관·정책조정국장, 1980년 경제기획국장을 지내면서 5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할 때 핵심 역할을 했다. 1982년 김재익(1938∼1983년) 청와대 경제수석이 주도한 이른바 ‘(경제기획원의) 재무부 점령 사건’ 때 강경식 재무차관과 함께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옮겼다. ‘김재익 스쿨’은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안정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 개방을 의미했고 이 이론의 실무 입안자 중 한 명이 고인이었다.
고인이 재무부에서 추진한 일이 바로 금융실명제다. 당시 ‘장영자 사건’으로 인한 금융시장의 혼돈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1989년 대선 선거공약에 포함되면서 재무부에 실시 준비단까지 설치됐지만 1990년 유보됐다가 김영삼 대통령 때 전면 실시됐다.
고인은 재무부 제1차관보를 지낸 뒤 건설부·재무부·경제기획원의 3개 차관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1990년 산업은행 총재가 됐다. 문민 정권이 들어설 즈음 금융계에서 주목받던 4명의 은행장 중 한 사람이었다.
김영삼 정부 첫 내각의 내무부 장관으로 내정됐다가 막판에 뒤집혔다는 설도 있다. 이후 개각 때마다 입각설이 돌다가 1994년 말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주대·세종대 등에서 강의를 하거나 저서를 집필했다. 2003년 세종대 정보통신대학원장 겸 소프트웨어대학원장을 지냈고 말년까지 한국개발연구원 일을 돕기도 했다. 저서에 ‘한국경제발전론(1980년)’ ‘한국경제론:성숙기의 국민경제운영의 과제와 방향(1988년)’ ‘21세기 경제정책의 대전환(1993년)’ ‘번영의 조건(2008년)’ ‘번영학:행복추구를 위한 정치경제학(2016)’ 등이 있다. 유족은 “회고록을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발병하셨다”고 말했다.
유족은 부인 김순애 씨와 1남 1녀 예진·준우(골든게이트글로벌 대표이사) 씨, 사위 장준수(봉추푸드시스템 대표이사)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 27일 오전 7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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