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가 위험하다. 과거 글로벌 경기 침체에도 한국 경제의 밑동 역할을 하며 굳건하게 지탱했던 대들보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가 무너지면 무역수지·경상수지마저 위태롭게 되고 도끼눈으로 한국 경제를 눈여겨보는 외국인들의 태도도 돌변할 수 있다.
우선 경쟁국 기업들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대만 TSMC는 지난 3분기 삼성전자의 ‘반도체 아성’을 모래성 허물듯이 무너뜨렸다. TSMC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8% 급증한 27조 5000억 원을 달성하며 삼성전자를 보란 듯이 추월했다. TSMC가 삼성전자를 따돌리고 글로벌 1위에 오른 것은 사상 처음이다.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이 31% 급감하며 어닝쇼크를 보인 것을 더 이상 예외적인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SMC가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는 매년 5.1%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장악하고 있는 메모리 분야는 연간 1.5%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시간이 갈수록 메모리 강자인 한국 반도체의 위상과 지위가 약화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지형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경쟁국 정부들이 ‘코리아 타도’를 외치며 의회와 기업과 삼각 편대를 꾸려 반도체 패권 장악에
국운(國運)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분쇄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고성능 인공지능(AI) 반도체와 슈퍼컴퓨터용 칩 수출을 통제하고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대한 반도체 제조 장비와 기술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는 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사전 조율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애써 큰소리치고 있지만 미중 갈등이 증폭되면 우리 기업들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로 중국 반도체 시장이 위축되면 매출의 4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더 쪼그라질 수 있다. 이에 더해 경쟁국 기업들의 ‘반도체 칼날’은 더욱 예리해지고 있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가 지방자치단체의 몽니와 어깃장에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외 기업들은 ‘반도체 근육’을 더욱 단단하게 키우고 있다.
중국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올해 총 43억 달러를 설비투자에 투입할 예정인데 이는 지난해 투자금액(20억 달러)의 두 배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낸드플래시 회사 양쯔메모리(YMTC)도 내년에 70억 달러를 들여 신규 설비 구축에 나서는데 이는 올해 시설 투자금액(35억 달러)의 두 배 수준이다.
정보기술(IT) 기업 IBM은 뉴욕에 10년간 200억 달러(약 28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공언했고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뉴욕주 북부에 1000억 달러(약 143조 원)를 들여 새로운 공장을 짓기로 했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법이 적용돼 520억 달러(약 74조 2000억 원)의 보조금과 25%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인센티브가 크게 작용했다.
글로벌 시장은 그야말로 반도체 전시(戰時) 상태인데 한국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여야 정쟁의 희생양이 된 채 반도체특별법은 국회에서 심의조차 못 하고 있다. ‘대기업 지원=특혜’라는 낡은 도그마에 사로잡혀 기업 투자 방안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투자를 통한 고용창출은 헛구호가 되고 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붉은 여왕에게 묻는다. “힘껏 달리는데 왜 제자리인가요?” 붉은 여왕이 답한다.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간신히 앞으로 나갈 수 있어. 가만히 있으면 뒤로 밀리게 되지” 한국 반도체는 지금 ‘붉은 여왕의 트랩’에 걸려 되레 뒷걸음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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