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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이 어쩔 수 없이 꺼내 든 ‘RP 6兆 매입’에 숨겨진 4가지 속내 [조지원의 BOK리포트]

①자금 조달 경쟁 줄여 자금 순환 원활하게

②"긴축 기조 포기하지 않았다" 신호 강조

③막힐 뻔한 통화정책 파급경로 미리 뚫어

④정책 타이밍 맞춰 시장 신뢰 회복 극대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 도착해 시중 은행장들과 만찬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로 단기자금시장 흐름이 꽉 막히자 결국 한국은행이 나섰다. 한은이 시장 안정화 조치에 나선 것은 코로나19 위기가 터졌던 2020년 3월 이후 약 2년 반 만이다. 특히 6조 원 한도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은 27일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이 공개되기 전까지 시장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치다. 레고랜드 사태가 없었다면 이번 금통위에 오르지도 않았을 안건이지만 사태가 시급한 만큼 유동성 공급 부담에도 불가피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다.

다만 한은은 거시경제 여건이 코로나19 당시와 다른 만큼 이번 조치가 유동성 공급이 아닌 유동성 조절 또는 원활한 자금 순환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RP 매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시장에 미칠 영향과 함께 통화정책과의 상충 가능성,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의 긴축 강화 등 여러 변수를 놓고 입체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예상 밖 RP 매입 조치를 단행한 한은의 속내는 무엇인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봤다.

26일 서울 남산에서 도심 일대 주요 기업체 건물들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① 대형 증권사 대상이지만 단기시장 도움 기대

한은이 이번에 실시하기로 한 RP 매입은 6조 원 규모로 3개월 한시적 조치다. 금융기관들이 RP 매매 대상 증권을 가져오면 한은이 준거금리보다 10~20bp(1bp는 0.01%포인트) 높은 금리로 이를 매입해 단기자금을 공급한다. 주로 14일물 등 단기물을 중심으로 증권사 유동성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대응할 예정이다. 이번 정책이 시행되면 증권사는 보유 중인 담보 증권을 한은에 맡기고 단기 자금을 빌려 쓸 수 있다.

문제는 한은의 RP 매매 대상기관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증권사(은행도 포함되지만 이용할 가능성이 낮다) 중에서도 메리츠증권,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 신한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한국증권금융 등 대형 증권사만 해당된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대형 증권사가 중소형 증권사와 경쟁하며 시중에서 자금 조달 경쟁을 하지 말고 한은의 RP 매입을 통해 단기 유동성을 확보하라는 취지인 셈이다. 한은이 직접 거래할 수 없는 중소형 증권사가 시중에서 원활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간접적 조치인 셈이다. 적용 금리는 특혜가 되지 않으면서도 대형 증권사를 유인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27일 서울 시내 한 은행에 붙은 주택담보대출 관련 금리 안내문. 연합뉴스


② 영국 꼴 날라 유동성 ‘공급’ 아닌 ‘조절’ 강조

한은은 이번 시장 안정화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례적으로 세 번에 걸쳐 같은 내용을 반복해 강조했다. 이번 RP 매입이 기존의 긴축적 통화정책 기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보도자료로 “(이번 RP 매입은) 현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것은 아님”이라고 강조하더니 별도의 Q&A 자료에서 “유동성 추가 공급이라기 보다는 유동성 조절 차원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재차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출입기자단 공지로 “자금 순환을 도모하기 위한 유동성 조절”이라며 “이창용 총재의 국회 답변과 상충되지 않는다”라고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이 총재는 대규모 유동성 공급안에 대해 “지금 하기 적절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한은의 RP 매입으로 유동성 공급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조절이라고 수차례 강조한 것은 바로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유동성을 다시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RP 매입을 통해 시장에 자금이 풀리면 금리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를 다시 적정 금리로 맞추는 과정에서 통화안정계정 등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자금을 다시 거둬들인다는 것이다.

2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왕시장에서 상인들이 김장용 채소들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보다 중요한 내심은 정책 엇박자로 극심한 시장 불안을 겪은 영국 사례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최근 영국은 대규모 감세안으로 시장 불안이 나타나자 긴축 기조에도 불구하고 긴급 국채 매입을 단행했다. 한은의 RP 매입이 긴축적 통화정책을 포기한다는 오해를 일으킬 경우 물가나 환율 불안이 계속돼 외국인 자금 이탈이나 원화 가치 급락이 나타날 수 있다. 이를 의식한 이 총재는 24일 국회에서 “해외에서 이 정책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은이 저신용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을 위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재가동이나 금융안정특별대출과 같은 전면적인 유동성 공급 대책에 선을 긋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매입 한도를 6조 원으로 제한한 것 역시 코로나19 당시 도입해 ‘한국판 양적완화’로 불렸던 무제한 RP 매입과 차이를 둔 것이다. 무제한 RP 매입은 고정금리 모집으로 입찰해 응찰금액 전액을 낙찰했지만, 이번엔 복수금리로 경쟁입찰해 예정된 금액 안에서만 낙찰한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모습. AP연합뉴스


③ 美 연준 긴축 대비해 통화정책 경로 미리 확보

한은이 기준금리를 결정하면 단기시장금리, 장기시장금리, 은행 예금·대출 금리가 차례로 움직이면서 실물 경제에 영향을 준다. 이번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자금시장 경색이 나타나면서 주요 통화정책 파급경로인 금리 경로가 막힐 위기에 처한 점도 한은이 빠르게 손을 쓴 이유 중 하나다. 이날 한은은 “이번 조치들은 통화정책의 주요 파급경로인 단기금융시장과 채권시장의 원활한 작동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은의 마음이 급해진 이유도 있다. 당장 다음 주에 열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 연준이 4연속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에 나서고 강도 높은 긴축을 예고한다면 한은 역시 2연속 빅스텝(금리 0.50%포인트 인상)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자금시장 경색이 지속되는 데다 통화정책 경로마저 막혀 있다면 적기 대응이 어렵다. 이미 시장에서는 한은이 자금시장 불안으로 빅스텝을 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혹시 모를 빅스텝 가능성에 대비해 통화정책 경로를 미리 뚫어 놓은 셈이다.

23일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한 최상목(왼쪽부터)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추경호 경제부총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연합뉴스


④ 다른 정책과 보조 맞추고 연말 연초 타이밍 고려

연말 연초가 다가오면서 시장 불안이 확대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도 한은이 RP 매입에 나선 배경이다. 연말 또는 분기 말이 되면 주로 자금을 공급하는 가계나 기업이 재무제표상 부채비율 감축 등 이유로 자금을 움직여 변동성이 커진다. 기준금리 인상 기조에서 이와 같은 계절적 요인이 레고랜드발 자금경색과 겹치면 시장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이번에 발표된 조치 대부분이 3개월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점도 일단 연말 연초를 넘기자는 계산이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단기금융시장 불안 심화 현상이 연말 연초 단기자금 경색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대비 차원으로 내년 1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실시하겠지만 연장 여부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은이 이날 함께 발표한 적격 담보증권 및 대상증권의 확대나 차액결제 담보증권 제공비율 인상 유예 등 다른 정책의 효과를 높이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금융위원회가 예대율 규제를 완화하기로 하는 등 여러 부처의 정책 발표 타이밍을 27일 금통위로 맞춘 것도 이 때문이다. 레고랜드발 시장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한은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신호를 주는 것도 노림수다. 유동성을 얼마나 공급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이 나섰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장 신뢰를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의 한 관계자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잘 되던 거래가 최근 들어 갑자기 안 된다는 것은 시장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심리적 요인이 큰 것”이라며 “정책 당국이 뭔가를 계속 시도하면서 신뢰를 회복하게 만들면 돈을 가지고 있는 주체끼리 알아서 다시 거래해 자금이 돌 수 있다”고 말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경제학계 전반의 소식을 전하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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