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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하루]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강철조약 체결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1939년 5월 22일





1939년 5월 22일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로마에서 중대한 조약에 서명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피의 조약’으로 명명하기를 원했지만 부정적 어감을 이유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반대했다. 양측은 강철조약(The Pact of Steel)이라는 이름에 합의했다.

견해 차이는 또 있었다. 이탈리아는 일본까지 초청해 3국동맹을 결성하려고 했다. 파시즘·나치즘·군국주의 동맹이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독일은 반대했다. 만주 침략 후 소련을 견제하려는 일본을 위해 독일이 유럽에서 두 개의 전선에 직면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서부에서, 소련을 동부에서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독일에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배제됐다.



강력한 양자 동맹의 출현으로 유럽은 파시즘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조약은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 전반부는 강고한 경제외교 군사동맹을 표방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양국은 군수품 생산에서도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했다. 한쪽의 동의 없이는 정전조약 체결도 불가능했다. 후반부의 부속 비밀의정서에서는 전문가들을 상대국 수도에 상주시키며 선전전에서도 공조할 것을 못 박았다.

이탈리아는 3년 내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 예측부터 잘못이었다. 불과 석 달 후인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조약을 이행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1940년 6월에야 프랑스 남부를 침공했던 것도 준비 부족 때문이었다.

한때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우상이었다. 히틀러는 모든 면에서 무솔리니를 모방했다. 그러나 외교에서의 상황 오판이 우상의 몰락을 초래했다. 히틀러의 수를 읽지 못한 채 나치 독일을 혈맹으로 환대한 대가로 무솔리니는 2차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최소 10년을 기약한 강철동맹은 결국 5년도 못가서 잔뜩 녹슨 채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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