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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비전 프로'에 딱 맞춘 SK하이닉스 D램 뜯어보기 [강해령의 하이엔드 테크]

애플 비전 프로의 R1 칩. 사진제공=애플




정보기술(IT) 시장에 관심 많으신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얼마 전 SK하이닉스가 애플의 혼합현실(MR) 기기 '비전 프로'에 새로운 종류의 D램을 공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기사로 전해드렸습니다. 정확히는 애플의 새로운 MR용 칩 'R1'과 연동하는 D램인데요. SK하이닉스 측은 “고객사 정보는 확인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지만 다양한 매체들이 이 사실을 조명했죠.

이번 연재물에서는 기사 작성 중 생략된 여러 가지 취재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려고 합니다. 기나긴 여행처럼 스크롤 압박이 심한 이 기사를 딱 한 개 단어로 요약해보면요. 지연성(latency)입니다. '연산 시간'을 줄이는 칩을 개발하기 위해 애플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애플의 요구를 충족하는 D램을 만들기 위해 SK하이닉스는 어떤 기술을 선택 했는지 상상하면서 읽으시면 재밌습니다. 또 한 가지 포인트가 더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SK하이닉스의 애플 비전프로용 D램은 ‘니어 메모리’이자 ‘엣지디바이스’용 맞춤형 제품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지난 시리즈에서도 다뤘던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서버용으로서 프로세서와 아주 가까이 붙어있는 ‘니어 메모리’였는데요. 이번의 맞춤형 D램은 우리의 손에도 쥘 수 있는 소비자용 IT 기기, 소위 엣지 디바이스에 초점이 맞춰진 또 다른 형태의 니어 메모리라는 점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D램들이 메모리 계층도 전반으로 퍼져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끈다는 의미겠죠?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애플은 비전 프로 안에 기존 자체 프로세서인 M2와 함께 MR 기기용 프로세서 R1을 넣어 ‘듀얼 칩’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 R1에 SK하이닉스의 맞춤형 D램이 탑재했습니다. 사진제공=애플


◇먼저 R1 칩 개발자들의 고민을 상상해봅시다

제일 먼저 비전 프로의 야심작 R1 칩의 콘셉트에 대해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혹시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기기 써보신 경험 있으신가요. 혹시 쓰시면서 '아, 좀 어지러운데?'라고 느낀 적도 있으시죠. 이게 바로 ‘디지털 멀미’라는 현상인데요. 이걸 해결하려고 애플에서 꺼내든 카드가 R1입니다.

디지털 멀미가 일어나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MR 기기의 이미지 구현을 위한 연산 과정이 사람의 감각·움직임보다 느린 게 주요 이유입니다. 애플은 이 속도의 문제를 풀고 싶어했고 으로 이걸 해결했습니다. 애플 비전 프로는 R1 칩으로 각종 카메라와 센서에서 들어온 바깥 정보를 인지한 뒤 단 0.012초 만에 새로운 화면을 만듭니다. 방금 독자님들께서 눈을 깜빡인 속도보다 8배나 빠릅니다. 데이터 지연을 눈 깜빡하는 시간보다 빠르게 바꾼거죠.

R1이 이렇게 정보 딜레이를 낮추려면 연산 보조 역할을 하는 D램 메모리도 기존과 다르게 뭔가가 바뀌어야겠죠. 스텝을 맞춰야 합니다. 상상컨대 이 과정에서 애플 엔지니어들은 이런 고민을 했을 것 같습니다.

1. D램 자체의 정보 전달 속도가 지금보다 빨라지면 R1이 본연의 역할을 더 잘할 것 같다.

2. 프로세서와 D램 간 정보 교류가 빠르려면 D램과 R1 간 위치가 정말 가까워야 한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프로세서 안에 내장돼 잠깐씩 정보를 기억해두는 '캐시(cache)메모리' 역할을 하는 S램의 존재도 알고 있습니다. 정보 처리 속도도 D램에 비해 수십 배는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아예 프로세서 안에 내장이 돼 있으니 CPU와의 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 R1 안에 있는 S램 공간을 최대한 늘려서 지연성을 낮추면 안될까?



문제는 용량입니다. 일단 SRAM은 D램보다 설계 구조가 복잡합니다. 1비트 단위를 구성할 때 D램보다 더 많은 소자(트랜지스터)가 쓰이거든요. 그래서 면적을 많이 잡아먹고 만드는 돈도 많이 듭니다. 괜히 업계에서 Cache가 아닌 캐시(cash) 메모리라는 농담이 나오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응용 범위도 제한적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요. S램은 한 개 중앙처리장치(CPU) 바로 옆에 128킬로바이트(KB) 용량 제품이 내장되는 게 일반적인데요. 1바이트는 8비트이고, 킬로=1000. S램 안에 102만4000개의 0또는 1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많이 쓰인다 해도 노래 한곡 용량 수준의 수 메가바이트(MB) 크기죠.

또 이게 얼마나 작은 용량인지 범용 D램과 비교 해보면요. 요즘 DDR5 D램 용량이 160억 개 기억 공간(16기가비트)으로 구성되는 것에 비하면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죠. 더구나 애플은 비전 프로로 고용량의 3D 이미지를 주로 구현을 해야 하는데 MB 용량이 성에 찰까요.

물론 요즘은 S램을 칩 형태로 만들어서 프로세서 위에 등딱지처럼 붙는 결합 기술도 있는데요. 그렇다 해도 S램 고유의 용량으로는 수십 층을 쌓아야 하는데, 그럼 비전 프로의 최종 시장 가격과 부피가 ‘감성’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수준이 될 겁니다. 이런 고민들 끝에 애플은 메모리 회사에 문을 두드렸을 것 같습니다. 비전 프로 'R1'을 만족하는 맞춤형 D램을 만들어 달라고 말이죠.

◇SK하이닉스의 R1용 '커스텀' D램 뜯어보기





자, 이런 고민 끝에 SK하이닉스가 R1용으로 공급한 커스텀 D램 스펙을 조금 더 자세히 뜯어보겠습니다. 우선 용량. 1Gb으로 파악이 됩니다. D램 속에 약 10억 개 의 0 또는 1 신호가 저장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거죠.

큰 용량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에 쓰이는 최신 기성 D램인 LPDDR5X 칩 당 용량이 16Gb인 것에 비하면 1/16 수준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용량이면 R1 바로 옆에 붙어서 보조를 해줄 수 있는 충분한 용량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통상 쓰이는 SRAM보다는 훨씬 큰 기억 공간이니까요.

이제 가장 중요한 속도를 기존 D램보다 어떻게 끌어 올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이 D램에는 정보가 안팎으로 오고 나가는 입출구(I/O) 핀 수가 512개 입니다. 이게 얼마나 많은 것이냐면요. LPDDR5X D램 한 칩의 I/O 핀 수가 64개입니다. 고속도로에서 64개 차선이 8배나 늘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업계에선 대역폭이 넓어졌다고 해서 ‘와이드(Wide) I/O’ 라고도 부릅니다.

다만 각 I/O 핀 속도는 스마트폰 D램에 비해서 느린 편입니다. 맞춤형 D램의 I/O 핀 당 속도는 초당 2Gb인데요. LPDDR5X D램 핀 속도가 각각 초당 8.5Gb인 것에 비하면 거의 4분의 1 수준 밖에 안됩니다.

하지만 핀 수로 밀어붙입니다. 핀 수가 512개나 되니까요. 2Gbps(I/O당 속도) X 512(핀수), 즉 1024Gb/s, 다시 말해 128GB/s라는 정보 이동 속도(대역폭)가 나옵니다. 64개 핀으로 68GB/s 대역폭을 만들어내는 LPDDR5X 대비 2배나 빨라진 속도죠. 게다가 R1 바로 옆에 아주 껌딱지처럼 붙어서 한 개 칩처럼 움직이도록 '팬아웃' 패키징 방식으로 결합해 프로세서-D램 간 거리를 줄였네요.

결론적으로 △용량도 어느정도 되면서 △속도도 기존 모바일 D램보다도 훨씬 빠르고 △바로 옆에 붙어서 정보 이동 거리도 줄어드니까. 애플 입장에선 이 D램이 너무 마음에 쏙 들었겠죠. 그들이 원하는 멀미 현상을 없애줄 저지연성의 고속 D램을 구현한 겁니다.



아, I/O 수가 늘어난 것을 보고 HBM과 헷갈리시는 분들도 문의를 주셨는데요. 프로세서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다는 측면에서는 ‘니어(near) 메모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죠. HBM과는 접근 방식이 달라 보입니다. 우선 서버에서처럼 고용량을 구현하지 않아도 되니까 D램을 층층이 쌓아 올리지 않았고요.

HBM에서 I/O를 만들 때처럼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로 칩 중앙을 뚫지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 통상 HBM은 패키징을 활용될 때 기판(우리가 잘 아는 FC-BGA) 위에서 조립이 되는데요. R1은 기판이 필요 없는 '팬아웃' 패키징으로 만들어집니다. 기판도 없고 고급 기술 축에 속하는 TSV 공정도 없으니 원가도 많이 줄어들겠죠.

◇'메모리의 파운드리화', 유행이 될까요?

이번 SK하이닉스의 공급이 회사의 생산량이나 매출 증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 중론입니다. 우선 내년 출시되는 비전 프로의 연간 생산 물량이 최대 100만대로 예상됩니다. R1에 한 개 D램이 공급되면 총 100만 개 칩인 셈인데, 연간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이 10억~12억 대 가량인 걸 고려하면 아주 크지는 않은 사업이죠.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업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아주 재밌습니다. 만약 애플의 MR 기기 출시로 이 응용 D램 시장이 상상 이상으로 커진다면 주도권은 선점한 이들의 몫이겠죠.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일명 ‘메모리의 파운드리화’입니다. 원래 메모리 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선생산 후판매’죠. 마치 공산품처럼 일정한 스펙으로 원가를 낮춰 대량 생산해 놓고 고객사에 판매를 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SK하이닉스가 선보인 D램은 파운드리 사업의 특성을 쏙 빼닮았죠. 고객사가 요구하는 방식의 D램에 대해 선주문을 받고 생산을 한 사례니까요. 일명 ‘메모리의 파운드리화'입니다.



이런 형태의 독특한 프로젝트가 앞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업계에서 많이 나오는데요.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한 가지는 반도체 업계에서 고급 프로세서+메모리 결합, 패키징 기술이 상당히 주목받고 있어서인데요. 위에서 잠시 말씀 드렸 듯 내장된 S램을 아예 여러 칩 형태로 만들어서 프로세서 위에 붙이는 패키징도 주목받습니다. S램 칩을 결합, 64MB까지 만들어서 프로세서와 결합해버리는 AMD의 ‘V-캐시’가 아주 좋은 예죠. 이러한 사례가 늘어나는 만큼 D램과 시스템 반도체 간 결합이 일어날 가능성도 커집니다.

또 한 가지는 폼 팩터의 변화입니다. 박스나 벽돌처럼 생긴 스마트폰과 노트북 PC를 넘어서 이제는 접히기도 하고, 돌돌 말리기도 하고 비전 프로처럼 전혀 새로운 형태의 컴퓨팅 기술이 나오기도 하죠. 흔히 말하는 끝단, 엣지 디바이스의 변형은 무궁무진하기에 메모리 역시 ‘기성품’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오늘도 길고도 쉽지 않은 테크 고개를 넘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시고 이번 주말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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