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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 면제 남발에…정부, 달빛고속철 '퇴짜'

◆달빛고속철 예타 면제 논란

정치권 공세에 기재부 '반대' 입장

국비 4.5조 투입 거대사업 불구

여야, 특별법으로 졸속 면제 추진

비용·편익 수치 0.483밖에 안돼

광주·대구 고속道 이용량도 저조

강행땐 재정건전성 악화 불보듯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광주송정역과 서대구역 간 198.8㎞ 길이의 고속철도를 놓는 이른바 ‘달빛고속철도 건설’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정치권은 올 8월 헌정 사상 최대인 여야 의원 261명의 명의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권고하는 내용의 관련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재정 당국인 기획재정부가 “예타 면제는 안 된다”며 제동을 건 것이다.

예타 주무 부처인 기재부의 동의가 없으면 달빛고속철도의 착공이 어려워 지역 민심을 등에 업은 정치권의 노골적인 압박이 예상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 인프라 사업이 우후죽순 추진될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26일 서울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기재부는 최근 광주시와 대구시 측에 달빛고속철도 특별법의 핵심 조항인 예타 면제에 대한 우려를 담은 입장을 전달했다. 기재부는 광주·대구시 행정부시장과 달빛고속철도 특별법 관련 비공개 협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 관계자는 “(특별법으로) 예타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르면 2026년 착공해 2030년 완공될 예정인 달빛고속철도는 국비만 4조 5158억 원이 투입되는 대형 사업이다.

문제는 정치권이 이미 발의된 특별법을 통해 이번 사업을 예타 없이 졸속 추진하려는 데 있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가덕도신공항 등 공항 건설 특별법에 이어 철도 건설 특별법이 제정되면 전국적으로 모든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특별법을 통해 예타 면제를 추진하려는 시도가 잇따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공항 외 SOC 사업의 예타 면제를 특별법으로 추진하는 것은 달빛고속철도가 처음이다. 기재부는 광주·대구시 측에 달빛고속철도의 인적·물적 수요예측치 등 구체적인 추가 자료 제출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재부의 반대로 달빛고속철도 사업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커졌다. 특별법은 예타 면제를 권고할 뿐 의무 조항은 아니다. 한 전직 국책연구원장은 “지역 공항도 이용객이 없어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리는 촌극이 빚어지고 있다”며 “영호남 화합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경제성도 없는 사업에 혈세가 낭비돼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예타제도 무력화” 우려


“(일부 국책 사업은) 경제성만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가 전체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재정 당국 수장인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인한 예산 낭비를 겨냥해 한 말이다. 추 경제부총리가 이런 ‘작심 발언’을 내놓은 것은 수조~수십조 원 규모의 대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들이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대거 추진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기재부가 달빛고속철도 특별법의 핵심 조항인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반대를 표명한 배경에도 이런 맥락이 자리한다. 달빛고속철도 특별법에는 공항 외 SOC 사업 관련 특별법 중 처음으로 예타 면제 조항이 담겼다. 이번 특별법이 향후 다른 SOC 사업 추진 과정에서 예타제도를 우회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재부가 최근 대구·광주시와의 비공개 협의 과정에서 ‘달빛고속철도 특별법이 선례로 남으면 전국적으로 모든 SOC 사업을 예타 면제 특별법으로 추진하려는 시도가 잇따를 것’이라는 취지의 입장을 전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달빛고속철도) 특별법으로 예타제도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굳이 특별법으로 예타를 면제할 정도면 국가적으로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긴급한 사업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타 면제 사업은 급격히 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지난해 예타 면제 사업의 총사업비는 17조 2400억 원으로 전년(10조 5000억 원) 대비 7조 원 가까이 늘었다. 7년 전인 2015년(1조 4000억 원)과 비교하면 약 12배 급증했다. 같은 기간 예타 면제 사업 수는 13건에서 26건으로 2배 늘었다. 입법조사처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예외적으로 인정돼야 할 예타 면제가 주(主)가 되고 예타 실시는 부(副)가 됐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예타가 없으면 국비가 투입되는 대형 사업의 적절성을 제대로 따져볼 수 없다는 점이다. 정부는 1~2년에 걸친 예타를 통해 경제성·지속성 등 대형 사업의 여러 측면을 분석한다. 예타를 거치지 않으면 대형 사업에 대한 중립적·객관적 분석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초 정부가 1999년 예타제도를 도입한 것도 국책 사업의 남발로 인한 재정 누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유 교수는 “예타제도는 대규모 국비 투자 사업을 검증하는 합리적 시스템”이라며 “제도 도입 후 24년 동안 재정 건전성 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재정건전성 타격도 불가피


달빛고속철도의 경제성은 한 차례 분석된 바 있다. 국토교통부가 2021년 발표한 사전타당성조사 결과를 보면 달빛고속철도 사업의 비용·편익(B/C) 수치는 0.483에 그쳤다. 통상 B/C 수치는 1.0보다 커야 경제적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은 “사업을 추진할 타당성이 어느 정도라도 있으려면 B/C 수치가 최소 0.5는 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경제성이 낮게 분석된 것은 달빛고속철도가 담양·순창·거창·합천 등 대부분 ‘인구 감소 지역’으로 지정된 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순창·합천·고령 등 일부 지역은 소멸 고위험군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광주와 대구도 인구가 감소세인 것은 마찬가지다. 전국적으로 인구 감소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러야 2030년께 완공될 예정인 달빛고속철도의 수요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광주·대구 고속도로만 놓고 봐도 지난해 기준 일일 교통량이 2만 2322대로 전국 고속도로 평균치(5만 2116대)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재정 건전성 타격도 우려된다. 4조 5000억 원 규모의 달빛고속철도 사업은 전액 국비로 추진된다. 역대급 ‘세수 펑크’로 팍팍한 나라 살림에 기름을 붓는 셈이다. 정부는 올해 세금이 기존 예상보다 59조 원 이상 덜 걷힐 것으로 보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이번 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밀어붙여 재정 당국 압박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다만 기재부가 예타 면제를 담은 특별법에 끝까지 반대하면 예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2026년 조기 착공은 물 건너간다. ‘경제성이 없다’고 판명되면 사업 착수도 불가능하다. 이는 정치권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기재부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일 것으로 보는 이유다.



총선 위기에…與도 재정만능주의 그림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재정 만능주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고 있다. 여당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에 부합해 ‘선심성 정책를 배격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지만 ‘10·11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를 계기로 현금 지원 등 선심성 정책에 슬금슬금 시동을 걸고 있다. 집권 여당이 역대급 세수 결손이라는 나라 곳간 사정을 모른 척하고 미래 세대에 뒷감당을 맡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6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 정책위원회는 657조 원 규모의 2024년 예산안을 뜯어보며 민생 사업 증액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여당 내부에서는 국회 심사 과정에서 제도적 지원 확대뿐 아니라 지원금 인상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의 한 국민의힘 의원은 “나랏빚을 갚아나가는 것도 좋지만 ‘민생을 왜 책임지지 않는냐’는 불만이 계속 나온다”며 “통상 정부 예산안은 국회에서 유지 내지 감액되지만 올해는 증액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총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국민의힘은 집권 여당의 지위를 활용해 퍼주기 정책 대결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국민의힘은 전일 이장·통장의 월 기본 수당 인상(월 30만 원→40만 원) 추진을 공식화했다. 여당은 ‘수당의 현실화’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2019년 수당을 10만 원 인상한 뒤 4년 만에 10만원을 인상하는 것을 두고 총선을 겨냥한 ‘퍼주기’라는 시선이 적지 않다. 전국의 이장·통장은 9만 9000명에 육박한다. 이밖에도 여당은 지지 기반이 취약한 청년·소상공인 관련 예산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기조를 세웠고 지역 유지들이 수혜를 받은 지역 문화 조직 관련 예산 등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를 계기로 적극적 재정에 대한 요구가 수면 위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국회의원들이 모인 당 연찬회에서 “나라가 거덜 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하는 등 매표 정치를 극도로 경계해왔다. 당내에서는 이를 두고 “재정 건전성이 중요하지만 선거에서 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여당 초선) 등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확고한 기조에 불만이 표면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선거 패배를 계기로 재정 지원이라는 극약을 허용하는 분위기가 다시금 무르익는 모습이다.

나라 곳간 사정을 외면한 정치권의 요구는 연말로 갈수록 노골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지역민, 이해단체들의 요구를 외면하기 힘든 데다 여야 모두 서로 자신의 이름을 딴 생색 내기용 사업 편성 경쟁에 불이 붙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권자 환심 사기 경쟁에 ‘역대 최저 증가율(2.8%)’이라는 정부의 긴축 의지가 담긴 내년 예산안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편 정부 여당이 선심성 예산을 늘리려 하면서도 정작 경제성장에 필요한 미래 산업 연구개발(R&D) 예산은 대거 삭감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자 여당에서도 자성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예산 나눠 먹기식으로 추진된 사업에 대해서는 예산 감액 기조를 유지하되 바이오 분야 등 국가전략산업의 R&D 예산은 복원·확대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실제로 이날 정부가 여당 예결위원들을 상대로 한 예산안 설명회에서 일부 의원들은 R&D 예산 감액과 관련해 홍보 방식을 질타하며 4차산업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한 위원은 “R&D 예산은 여론전에서 이미 졌다”며 “바이오 등의 R&D 예산을 증액해 국민적 오해를 거둬들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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