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을 마친 지 고작 2년이 지났는데 재발이라니 절망적이었죠. 조혈모세포 이식의 부작용으로 기약 없는 입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항암 치료를 다시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
유리(17·가명) 양은 4년 전 고열과 피부 반점으로 근처 소아과를 찾았다가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한창 또래와 어울리고 싶을 나이에 꼬박 3년을 항암 치료를 받으며 견뎠다. 그런데 끝이 보이려는 순간 재발 소식을 들었다.
“힘든 거 있으면 말해. 옆에서 항상 같이 있어 줄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부모님 면회조차 막혀 홀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유리 양은 간호사 선생님의 독려로 용기를 냈다. 주기적으로 재발을 예측하기 위해 회당 100만 원을 내야 했던 미세잔존암 골수검사도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의 지원으로 비용 부담을 덜었다. 사업단의 도움으로 일곱 번의 검사를 무상으로 받은 유리 양은 재발 불안감을 떨쳐내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현재 유리 양은 경과 관찰을 위해 한 달마다 혈액검사를 받으며 여느 10대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꿈을 키우고 있다. 과거의 자신처럼 아픈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간호사가 되는 게 꿈이다.
유리 양처럼 암과 희귀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유가족이 내린 통 큰 사회 공헌 결단이 3년째에 접어들며 희망의 결실을 보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8일 의생명연구원 윤덕병홀에서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2021년부터 이어져온 소아암·희귀질환 사업 추진 현황 및 성과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소아·청소년 시기에 발병한 암과 희귀질환은 정복이 어려울 뿐 아니라 재발 가능성도 크다. 현재까지 확인된 소아 희귀질환은 7000여 종. 성인에 비해 질환 종류가 다양하고 환자 수는 적어 사례를 수집하기조차 어렵다 보니 대다수 환자들은 확진 후 적절한 치료를 시작하기까지 8~10년가량 ‘진단 방랑’을 겪는다. 더구나 소아 희귀질환을 진료하는 전문의는 전국을 통틀어 60명 남짓에 불과하다. 표준치료법이 확립되기는커녕 보험 혜택이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다. 암과 희귀질환으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환자와 가족들의 몫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유가족은 생전 ‘어린이가 미래의 희망’이라고 강조했던 선대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뜻깊은 결심을 했다. 어린이 환자들의 치료비를 지원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동시에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한 연구를 후원하기로 했다. 2021년 4월 전례 없는 규모의 기부금이 전달됐고 다음 달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이 꾸려졌다. 2021년부터 2030년까지 10년간 암과 희귀질환으로 고통받는 전국 어린이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치료 플랫폼 구축하는 게 사업단의 궁극적인 목표다.
사업단은 3000억 원의 기부금을 △소아암(1500억 원) △소아 희귀질환(600억 원) △소아 공동 연구 등(900억 원)에 배정하고 공동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질환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비급여로 분류된 고액 유전체 검사비나 면역·표적항암제 등 고가 신약 치료 비용으로 쓰인다. 사업단은 올해 9월까지 소아암 48건, 소아 희귀질환 19건, 공동 연구 109건 등 총 176건의 과제를 공모·선정했다.
서울대어린이병원을 중심으로 전국 160개의 의료기관과 1071명의 의료진이 동참하면서 3년간 소아암 1089건, 소아 희귀질환 1746건, 공동 연구 1149건 등 3984건의 진단이 이뤄졌다. 또 소아암 14건, 소아 희귀질환 627건, 공동 연구 1695건 등 총 2336건의 치료가 진행됐다. 공동 데이터베이스 기반 치료 플랫폼을 통해 등록된 코호트는 소아 희귀질환 857건, 공동 연구 5336건 등 6193건에 달한다. 사업단은 그동안 환자 데이터가 분산돼 진단에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모은 데이터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선순환 구조를 마련할 계획이다. 표준화된 치료법이 정립돼 전국 환자 모두 동일한 의료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면 고질적인 수도권 의료 쏠림 현상과 진단 방랑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영무 삼성사회공헌업무총괄사장은 “모든 어린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보살피는 일은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이 선대회장님의 유지”라며 “삼성의 모든 임직원들도 소아암 희귀질환 극복사업이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겠다”고 전했다. 김한석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장은 “소아암·희귀질환 극복 사업이 전국의 연구자와 환자에게 큰 희망이 되고 있다”며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전국 권역 기관과 의료진의 참여가 더욱 확산되고 궁극적으로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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