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현상)’ 해소를 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가운데 주가순자산비율(PBR)을 핵심 지표로 한 상품 지수가 나올 전망이다. 상장지수펀드(ETF) 등 이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의 출시를 적극적으로 유도해 기관·외국인투자가 자금을 증시로 끌어들이겠다는 복안이다.
4일 당국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국거래소는 PBR을 핵심지표로 활용해 평가가치가 낮은 기업들을 중심으로 상품 지수를 개발하고 있다. 앞서 당국은 지난달 주주가치가 높은 기업들로 구성된 상품 지수를 개발해 이를 추종하는 ETF 상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 그 주요 기준을 결국 PBR로 삼은 것이다. PBR은 기업의 현 주가를 주당 순자산 가치로 나눈 수치다. PBR이 1배 미만이면 시가총액이 청산가치보다 낮을 만큼 평가절하돼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 상장사의 평균 PBR은 1.1배로 미국(4.5배)은 물론 일본(1.4배)보다 낮다. 금융위와 거래소는 이 같은 방안을 담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정책을 이달 말 발표할 예정이다.
거래소 관계자는 “PBR 중심으로 투자가치가 높은 기업을 중심으로 지수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지수를 추종하는 ETF나 펀드를 출시하도록 해 증시 자금을 늘려 전체 주가를 견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지수에 편입하는 상장사를 PBR뿐 아니라 현금 흐름까지 고려해 선정할 방침이다. 순자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현금 형태로 보유한 기업만이 자사주 매입 등 주주 환원 정책을 적극 고려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PBR 1배 미만’과 같은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은 낮다.
금융위 관계자는 “업종에 따라 PBR이 천차만별이어서 일본도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며 “단순하게 PBR이 낮다고 저평가, 높다고 고평가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당국은 이와 함께 자산 총계 5000억 원 이상인 상장사가 의무적으로 작성하는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에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기재하면 우수 공시 법인을 선정할 때 가점을 주는 방안도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잘 써낸 상장사는 불성실 공시 법인 지정 때도 감경을 받을 수 있다. 세액공제 등 추가적인 세제 혜택은 정책에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금융 당국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가운데 ‘주가순자산비율(PBR)지수’ 개발에 우선적으로 속도를 내는 것은 이 정책이 법 개정 없이도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는 PBR지수를 만들고 이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까지 선보이면 짧은 기간에 국민연금공단 등 기관과 외국인투자가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자본시장 지원 방안에서 이사 책임 강화, 주주총회 내실화 등은 상법 개정이 필요하고 배당 절차 개선 등은 자본시장법을 바꿔야 하는 사안이라 총선 전까지 단기간에 추진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당국과 거래소는 지수를 PBR 중심으로 개발하되 자기자본이익률(ROE)·주주환원율 등 다른 지표도 적절하게 반영하기로 했다. ROE는 당기순이익을 자기자본과 비교한 지표다. 기업이 내는 이익이 보유 자본에 비해 얼마나 많고 적은지 판단하는 데 쓴다. 주주환원율은 당기순이익에서 배당금과 자사주 매입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한다. ROE가 높아 이익을 꾸준히 내는 기업일수록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소각 등을 통해 자본 규모를 줄여 PBR을 높일 수 있다. 당국은 주주 환원이라는 정책 목표를 충족하면서도 ETF 출시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투자 매력이 높아야 한다는 점을 지수 개발의 핵심 요소로 판단하고 있다.
당국은 PBR지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사주 보유 여부는 편입 기업을 고를 때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자사주 의무 소각 정책이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 문제로 보류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기업의 자사주 보유 비중 자체를 주주 환원 의지와 직결해 생각할 수 없다는 점도 감안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주주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고 있다”며 “여러 지표를 복잡하게 넣기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정책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패는 기관 참여에 달렸다고 보고 이들의 지수 상품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계획이다. 특히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호응에 초기 시장 반응이 좌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기축통화국이 아닌 만큼 한국은행 등 다른 국가 금융기관은 해당 지수로 만든 ETF를 매입할 수 없다.
실제로 당국이 PBR지수의 참고 사례로 활용한 일본거래소그룹(JPX)의 ‘JPX프라임150’도 기관투자가들의 벤치마크 활용에 힘입어 상장사 기업가치 제고 효과를 봤다. JPX는 지난해 자기자본 비용 이상의 수익을 낸 기업과 PBR 1배를 초과하는 기업에 가중치를 부여한 JPX프라임150지수를 발표한 바 있다. 일본의 경우는 특히 주요 공적연금 자산을 관리 운용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이 닛케이400지수와 관련 ETF를 패시브 투자 벤치마크로 사용했다. GPIF는 한국의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도 ETF 매입에 나섰다.
노동길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은 정부가 JPX프라임150지수를 개발해 상품화하고 기관투자자의 벤치마크로 활용하도록 한 덕분에 상장사들도 ROE 제고 노력에 힘쓰게 됐다”며 “기관에 인센티브를 제공해 증시 부양 효과를 유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래소 관계자도 “지수 개발은 기관 참여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도 정부가 이달 말 발표할 예정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관심을 키우고 있다. 그동안 PBR이 낮아 주가가 저평가됐던 은행·증권·자동차 등 일부 업종의 주가도 최근 덩달아 급등세를 보였다. 신한투자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밸류업 도입 계획 발표 이후 보험(21.1%), 상사·자본재(13.9%), 증권(13.9%), 자동차(12.8%), 은행(10.1%) 업종의 주가 상승률은 코스피지수(2.9%)의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다.
운용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일본이 주가를 부양했던 성공 모델이 있기 때문에 과거 정권보다는 실효적인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고 밝혔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국민연금 등 자본시장 큰손들이 해당 지수를 추종해 자금을 집행해야 한다”며 “연기금이 움직일 때 증시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