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도쿄증권거래소의 홈페이지에는 소위 ‘블랙 앤드 화이트’ 명단이 공개됐다. 주가 부양 방안을 발표한 상장사와 그렇지 않은 곳을 분류한 리스트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3월 상장사들이 지배 구조 보고서 등을 통해 자본의 효율적 활용과 주가 제고 방안을 자체적으로 밝히도록 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기업을 명시하겠다고 예고했다. 일본 당국은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 기업에 대해서는 주가를 올리지 않으면 하위 등급 시장으로 강등시키거나 아예 상장폐지하겠다고 으름장도 놓았다. 이번 1차 명단 발표는 밸류업 프로그램이 엄포가 아니라는 점을 기업들에 재확인시켜준 셈이다. 거래소는 매달 명단을 공개할 방침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압박만으로도 이미 일본의 경영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증시 활황의 배경 중 하나로 밸류업 프로그램이 주목받는 가운데 한국 정부도 이를 벤치마킹해 한국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방침이 발표된 후 한국 증시 엑소더스 행렬에 가담했던 개인투자자와 외국인투자가들도 순매수로 돌아서며 하락세는 주춤한 모양새다. 한 외국계 증권사의 부사장 A 씨는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17일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놓겠다고 밝힌 후 벌써 100곳이 넘는 해외투자가들이 문의를 해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외국인들은 정부 발표 이후 코스피 시장에서만 6조 원가량 ‘주식 쇼핑’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외국의 정책을 일부 벤치마킹해 도입하는 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적 해소책이 되기는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주가 수준 왜, 얼마나 낮은가
한국 증시는 과거부터 숙명처럼 ‘디스카운트’의 굴레를 써왔다. 북핵 리스크와 같은 지정학적 변수에 한때 크게 휘둘렸다. 글로벌 경기에 따라 출렁이는 기업 이익은 대표적인 주가 할인 요인이다. 한국이 수출에 주로 의존하는 소규모 개방경제여서 벗어나기 힘든 한계다. 환율 변동성은 외국인투자가들에게 추가적인 리스크다.
그러다 보니 자산 대비 낮은 주가는 한국 증시의 고질병이 됐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기준 국내 상장사 2608개 중 1109개가 PBR이 1배를 밑돈다. 10년째 PBR이 1배 미만인 상장사도 513개나 됐다. PBR이 1배 미만이라는 것은 투자자들 입장에서 이 회사는 영업을 하면 할수록 지금 갖고 있는 자산을 깎아 먹을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각종 디스카운트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상장사들의 주가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다. 지정학적 리스크, 대외 의존도, 환 변동성 면에서 한국 못지않은 대만의 2023년 말 기준 PBR은 2.4배 수준이다. 한국(0.95)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한국 상장사들의 디스카운트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낮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ROE는 자본 활용도를 나타내는 지표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일반 주주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귀속되는 몫인 자본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므로 그 지표인 ROE가 투자 결정 시 핵심적인 기준”이라며 “자본 활용도가 낮으면 주가가 할인돼 PBR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블룸버그와 신영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ROE는 코스피 상장사 평균이 5.0%, 코스닥 상장사 평균은 3.68%에 그쳤다. 반면 일본은 8.2%, 미국 스탠더드푸어스(S&P)500 기업은 17.89%, 나스닥 기업은 16.3%다. 일본의 경우 ROE가 2020년에는 4.19%에 불과했으나 그 사이 두 배로 뛰었다. 코스피는 2020년 4% 수준에서 찔끔 증가했다.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에서 기업들에 자본 수익성과 성장성을 밝히라고 주문하는 것도 ROE를 높이기 위한 방안이 주가 상승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국 상장사들이 지탄을 받고 있는 ‘인색한 주주 환원’도 효율적인 자본 활용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회사가 깔고 앉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자본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을 하면 ROE가 즉각 올라간다. 애플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ROE가 높은 것은 실적도 좋지만 배당과 자사주 소각을 꾸준히 하기 때문이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한국 상장사들은 회사의 미래를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거나 주주들에게 적극적으로 환원하지 않기 때문에 주주총수익률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주주총수익률은 12%, 일본은 9%인 데 반해 한국은 5%에 불과했다. 이효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기업들의 경우 영업자산 활용도는 높은 데 반해 비영업자산 활용도는 떨어진다”고 꼬집었다.
만연한 쪼개기 상장도 한국 주식 투자의 리스크 요인으로 여겨진다. 기업들이 신사업 부문에 대해 물적 분할 후 별도 상장을 반복하다 보니 기존 주주들은 기업 성장의 혜택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 시가총액은 2013년 말 1186조 원에서 이달 5일 기준 2107조 원으로 76.7%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28.8% 늘어나는 데 그쳤다. 메리츠증권은 “물적 분할에 따른 모회사·자회사의 복수 상장이라는 지배 구조 문제로 한국 증시가 글로벌 증시 대비 주가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야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잇단 주가 제고 방안…미시적 접근 한계
물론 그동안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윤석열 정부 들어 적극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마련해왔다. 물적 분할 후 재상장 시 반대하는 기존 주주들에게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하거나 인적 분할 시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자사주의 마법’을 원천 차단하기로 했다. 외국인투자가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외환시장 개장 시간을 새벽 2시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30년 묵은 외국인 투자 ID 제도 폐지, ‘깜깜이 배당’ 개선 방안, 자사주 제도 손질 등 쉴 새 없이 제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증시가 저평가에서 탈출하지 못하자 정부는 이달 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가로 발표하기로 했다. 동분서주하며 온갖 약을 쓰고 있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고질병은 도통 치유되지 않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미시적인 정책만으로 ‘밸류 트랩(가치 함정)’에 빠진 한국 증시를 구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증시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서는 일관된 정책을 통한 신뢰 확보가 최우선으로 꼽힌다. 일본의 증시 부양책이 성공한 데는 투자자들의 믿음이 밑바탕이 됐다. 일본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지난해 3월 발표됐지만 큰 그림은 2021년 기시다 후미오 내각 출범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출산율 저하, 임금 정체, 소득 격차 확대 등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방안 마련에 나섰다. 상장사들의 지배 구조를 개선해 주가를 올리고, 가계에는 세제 혜택을 줘 일본 증시에 투자하게 하고, 정부가 마중물을 넣어 키운 스타트업들이 증시에 입성해 경제의 활력을 높이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일본 자민당 정부가 경제정책의 큰 틀에서 주가 부양책을 뚝심 있게 추진하자 국내외 투자자들이 이를 믿고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며 “한국도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고 일관되게 집행해야 저평가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오락가락하는 자본시장 관련 정책으로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 배당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고 지난해 9월 해외 기업설명회(IR)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시중은행들이 올해 초 상생을 명목으로 2조 원의 이자를 돌려주기로 하면서 ‘관치 금융’ 논란이 일었다. 은행주 투자자들에게 엇갈린 메시지를 준 셈이다. 정부가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지수 편입을 위해 외국인 ID 폐지 등 전향적인 개선책을 내놓았으나 하루아침에 공매도를 전면 금지해 외국인을 비롯한 기관투자가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정책이 폐지되는 일도 허다하다.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도입한 기업소득환류세제는 기업의 배당·투자·임금 지출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이었으나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정부 기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됐다. A 씨는 “지금 외국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대목은 4월 총선 결과가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라며 “한국 정부의 혼란스러운 시그널이 외국인들이 꼽는 가장 큰 리스크”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징벌적 상속·증여세, 기업의 성장성 제고를 가로막는 정책들을 손질하지 않고서는 어떤 주가 제고 방안도 대증 처방밖에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부자 감세’ 논리에 막혀 최대 60%에 이르는 상속·증여세를 손보지 못한다면 대주주와 일반 주주들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한국 증시가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기업들의 성장성에 있다. 예컨대 미국 증시를 주도하고 있는 기업들은 인공지능(AI) 기술 기업이다. 반면 한국은 이렇다 할 AI 기술 기업이 없기 때문에 미래 성장성을 보고 장기적으로 투자하기 힘든 여건에 처해 있다. 신진영 자본시장연구원장은 “현재 실적이 좋은 회사들은 주주 환원책을 쓰면 주가가 일부 올라가겠지만 상승에는 한계가 있다”며 "주가의 지속적인 동력은 결국 성장성이라는 점에서 규제 완화 등을 통한 기업의 기초 체력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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