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찾은 경주 보문 관광단지는 부산했다. 이달 3일부터 시작된 황금연휴로 관광객들이 몰린 데다 10월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로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보문은 1979년 문을 연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단지다. 신라시대 당시 수도 서라벌을 방어하던 옛 성터에 조성된 165만 ㎡(50만 평) 규모의 인공 호수를 중심으로 다수 호텔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5성으로 가장 고급인 힐튼호텔에서 만난 김 모 씨는 APEC이 열리는 경주에 대한 감상을 묻자 “수도권에서 왔는데 경주가 APEC 개최지라는 걸 처음 알았다”며 “호텔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면 시설이 열악해 조금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관광객이 봐도 우려스러운 경주의 현실은 유치 과정에서도 문제가 됐다. 지난해 6월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최종 확정될 당시 경쟁 도시였던 제주와 인천이 집중 공격을 한 것이다. 당시 추산한 정상회의 기간 방문객 수는 전체 인원 2만 명에 1일 최대 7700명이다. 각국 정상 참석 여부가 정해지지 않아 구체적 숫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총 인구 24만 명의 지역 도시가 감당하기는 힘든 수준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대해 경주시는 정상회의가 열리는 화백컨벤션센터 인근 10㎞ 내에 약 1만 3000개 객실이 있다며 수용을 자신하고 있다.
문제는 숙박 시설의 퀄리티다. 당장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글로벌 지도자들이 묵을 호텔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크다. 경주에는 제주(21곳), 인천(8곳)과 비교해 5성 호텔이 힐튼과 라한셀렉트 두 곳에 그친다. 해당 호텔들마저도 정상이 머무르는 최고급 객실 ‘프레지덴셜 스위트룸(PRS)’은 각각 1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APEC에 속한 미국과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정상 경호 등의 이유로 호텔을 공유하지 않고 통으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점을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경주 보문에서는 공사를 진행 중인 호텔이 많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화백컨벤션센터에서 가장 가까운 5성 호텔인 힐튼에서 보문호수를 따라 약 1㎞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노벨경주는 지난해 9월 문을 닫고 전면 리모델링을 진행 중이다. 운영사 대명소노그룹은 소노벨경주를 5성급으로 업그레이드해 10월 초 새로 문을 열 예정이다. APEC 정상회의 일정에 맞춰진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재오픈 시점이 늦어질수록 정상 경호를 위해 사전 답사가 필수인 주요국들이 선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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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벨에서 조금 더 보문호수를 따라가면 있는 5성 호텔 라한셀렉트는 정상 운영 중이었지만 이와 별개로 글로벌 정상들의 숙박을 위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객실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라한호텔그룹 관계자는 “정상회의 참석 국가 및 관계자들을 위해 외교부, APEC 지원단 등과 협조해 객실 공사 및 보수, 메뉴 준비 등에 만반의 준비를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들은 APEC 정상 숙박은 각 국가 VIP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라 추가적인 설명은 힘들다는 입장이다.
VIP를 모시기 위해 준비 중인 곳들과 달리 보문호 인근에는 그야말로 유령 호텔이 돼버린 곳도 있다. 과거 보문단지 개관과 함께 경주 최고 호텔로 유명했던 콩코드호텔이 대표적이다. 실제 5일 찾은 이곳은 다른 숙박 시설들을 위한 공사 차량이 무질서하게 주차돼 있고 관리되지 않은 수목으로 난잡했다. 문제는 이곳이 보문 한가운데 위치해 정상 및 내빈들의 동선에서 분리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주요 호텔과 인접해 있는 보문 상가 역시 운영이 중단돼 휴업한 지 오래다. ‘영업 준비 중’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나 다름없다. 연휴 기간 경주 보문을 찾은 관광객들이 호텔 안에만 머물고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콩코드 옆 코모도호텔에서 숙박 중인 한 관광객은 “어린 시절 수학여행 때 경주를 방문한 좋은 추억이 있다”면서도 “보문은 폐허가 돼버린 곳이 많아 APEC 회의를 하기에는 미관상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정상회의가 이뤄지는 화백컨벤션센터도 여전히 준비 중이다. 6월 중순까지 정상 운영하고 이후 리모델링에 들어가 9월에 준공 예정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시설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예정된 준공 시점이 9월인데 행사 개최까지 한 달밖에 시간이 없어 보완할 시간이 촉박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화백컨벤션센터 옆에 새로 들어서는 미디어센터 역시 연휴 기간인 5일에도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APEC 준비위원단 관계자는 “9월 말까지는 모두 완공해 행사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라며 “2005년 부산 APEC 이후 2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정상회의인 만큼 착실히 준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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