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조선에 이어 K항공이 미군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의 주요 협력 파트너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역거점운영유지체계(RSF)’ 계획에 따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군용기와 군함의 정비·보수를 본토로 불러들이지 않고 동맹국 MRO 거점(허브)에 맡기는 방안을 구상하면서다.
6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은 제조업 강국으로 조선과 항공 산업에서 특히 높은 경쟁력을 자랑한다. 먼저 앞서나간 것은 조선 분야다. K조선은 지난해 이미 두 건의 미 함정 MRO 사업을 수주했다. 한화오션은 올 3월 거제 조선소에서 6개월간의 수리·정비를 마치고 미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시라(USNS Wally Schirra)’호를 출항시켰다. 현재 두 번째로 수주한 미 해군 7함대 소속 급유함 ‘유콘(USNS YUKON)’호에 대한 정비를 진행 중이다. 올해는 HD현대중공업도 MRO 입찰에 나서 한국은 총 7~9건의 계약을 수주한다는 목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자국 조선업 부활을 위해 K조선에 협력을 요청하면서 MRO 사업을 넘어 상선과 특수선 건조까지 국내 조선소가 맡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 항공 분야는 조선에 비해 세계시장에서의 주목도가 떨어진다. 항공 산업은 첨단 항공 엔진 등 원천 기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후발 주자이기 때문에 100년 이상의 산업 역사와 경험을 가진 선진국에 뒤처져 있다. 현재 독자 전투기 엔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프랑스·러시아·우크라이나·중국 등 6개국뿐이다.
하지만 국내 항공 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부품 생산과 MRO 역량은 세계 선두권에 버금간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012450)는 글로벌 3대 엔진 제작사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영국 롤스로이스, 미국 프랫앤드휘트니(P&W)로부터 면허 생산 자격을 확보했다. 현재까지 1만 대 이상의 엔진을 생산했고 5700대의 엔진을 정비·보수했다. 대한항공(003490)은 2020년 2900억 원 규모로 주한·주일미군에 배치된 F-16 전투기의 수명 연장, 창정비 사업을 수주한 바 있다. 1978년부터 MRO 사업을 진행한 주한·주일미군 군용기가 3700대에 달한다. 한국우주항공산업(KAI)은 다목적 경전투기 FA-50PH를 필리핀에 수출한 뒤 지난해 성과 기반 군수지원(PBL) 사업자로 선정됐다. PBL은 MRO 등 군수 지원 업무의 성과에 따라 계약금과 별도로 성과금을 받거나 벌금을 내는 제도로 추가 계약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미 군용기 MRO 사업을 통한 항공 협력이 조선업·액화천연가스(LNG) 협력과 함께 한미 관세 협상의 새로운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 대의 항공기에 들어가는 부품은 최대 600만 개에 달한다. 그만큼 MRO에 기술과 경험이 요구된다. 한국이 미 군용기 MRO 허브로 낙점될 경우 연합 방위 태세에 주요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아울러 설계 등 원천 기술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미 항공 제조업 현장을 지원하는 파트너로도 역할이 가능하다.
각 업체는 미 군용기 MRO 사업이 구체화하기 앞서 일본과 호주·필리핀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MRO 경쟁국에 맞서기 위한 대비에 나섰다. 시설과 설비 규모를 늘리고 최신화해 비교 우위에 서겠다는 전략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12월 590억 원을 투입해 항공 사업을 담당하는 창원 1사업장의 항공 엔진 제조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올해 말 완공 목표로 현재 월 평균 4개의 엔진을 만들던 생산능력(캐파)이 2배로 늘어난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MRO 사업에 대한 미국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추가로 시설을 확장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미 코네티컷에 항공 부품을 만드는 4개의 사업장을 운영 중으로 이미 미 항공 부품 밸류체인에 들어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32년까지 글로벌 엔진 부품 사업 연간 매출 2조 9000억 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70%는 기존 엔진 부품 판매로 30%는 MRO 등 신규 사업으로 이루겠다는 구상이다.
KAI는 경남 사천시와 함께 사천 본사 인근에 MRO 사업 단지를 확장하고 있다. 사천시가 1759억 원을 투입하고 KAI가 관련 사업을 이끄는 모델이다. KAI는 2017년 정부로부터 항공 MRO 사업자로 선정돼 이듬해 MRO 사업을 전담하는 자회사 한국항공서비스(KAEMS)를 설립했다. KAEMS도 MRO 사업 단지 확장에 사업비 2481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단지에서는 우선 국내 주요 저비용항공사(LCC)의 MRO를 담당한다.
대한항공 또한 인천 영종도 운북지구에 새 엔진 정비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연면적 14만 200㎡ 규모로 총 투자금은 5780억 원에 달한다. 2027년 완공되면 정비 가능한 엔진 대수는 연 100대에서 360대로 증가하고 정비 가능한 항공기 엔진도 6종에서 9종으로 늘어난다. 이는 아시아 항공 정비 단지로서는 최대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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