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메일 대신 팩스, 카드 대신 현금을 쓰던 ‘갈라파고스’ 일본이 변신하고 있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정부 조직 체계를 바꿔 우리보다 먼저 인공지능(AI) 전담 부처를 출범시키더니 최근 AI 예산을 67% 증액시킨데 이어, 민간인 출신들까지 절반 넘게 영입하며 혁신의 가속페달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전환(DX)에 뒤처졌던 일본이 AI 정부를 필두로 한 AI전환(AX)에서는 한국보다 앞서나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무엇보다 정부의 DNA가 달라지고 있다.
6일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에 따르면 일본의 AI 전담 주무 부처인 디지털청은 올 1월 기준 총원 1180명 중 절반이 넘는 600명을 민간 출신 인력으로 충원했다. 출범 4년 만에 체질 개선에 성공한 것이다. 관료 출신보다 민간 경력자를 더 많이 채용해 자칫 탁상행정에 빠질 수 있는 AI 전담 부처의 기능과 역할을 보다 내실화했다.
반면 한국에는 아직 AI 전담 주무 부처가 없다. AI 정책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총괄하고 있지만 과기부 인원도 대부분이 행정 관료 출신이다. 경제 부처 출신인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나라에 AI 전담 부처가 만들어지더라도 행정고시 출신 관료들끼리 몇 번 순환근무를 돌리고 나면 전문성은 사라지고 각종 행정 규제만 남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AI 정부 예산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 올해 일본의 AI 분야 직접 지원 예산은 1969억 엔(약 2조 원)으로 전년 대비 67.4% 증가했다. 우리나라도 추가경정예산에 AI 관련 재원 1조 8000억 원을 배정하기는 했지만 집행 속도에서 일본과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AI 스타트업 1호 구매자는 日정부
지난달 말에 본지 기자가 찾아간 도쿄대 이학부 3호관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대학 캠퍼스 건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건물 3층에는 도쿄대와 소프크뱅크가 2019년 공동으로 설립한 ‘비욘드 인공지능(AI)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디지털전환(DX)에서 뒤졌던 일본의 AI 전환(AX)을 꿈꾸는 괴물 두뇌들이 이곳에서 양성되고 있는 것이다. 도쿄에서 만난 AI 스타트업 파인디(Findy)의 야마다 유이치로 대표는 “소프트뱅크 같은 대기업과 일본 정부가 함께 일본의 AI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본은 최근 글로벌 AI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주목받고 있다. 배후에 있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규제 완화 덕분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창업 1년 만에 기업가치 10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 유니콘 기업으로 발돋움한 사카나 AI다. 이 기업은 구글의 일본연구소에서 일하던 외국인 두 명이 창업했지만 일본의 소버린(국가 주권) AI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초기 구축에 수백억 원 규모의 자금이 필요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AI 스타트업 “정부, 민간 AI 솔류선 선구매 해야” 한목소리
일본 현지에서 만난 스타트업 전문가들은 단순한 지원 프로그램만으로 AI 킬러 기업을 키워낼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가 ‘1호 구매자(buyer)’로 나서야 선순환의 생태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AI 전담 부처인 디지털청이 재원을 투입해 기업들에 일감을 공급하고 여기서 나오는 자금으로 기업들이 생존하면서 실력을 키우는 구조가 이미 조성돼 있다. 과거 김대중(DJ) 정부 시절 우리나라가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을 육성했던 전략을 일본이 그대로 카피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일본 디지털청은 AI 스타트업의 기술 도입에 적극적이다. 법률 문서 자동화 AI 솔루션을 개발한 후지이 요헤이 부스트드래프트(BoostDraft) 대표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일본정책투자은행, 국제협력은행 등 정부 기관을 비롯해 재단법인, 대학 등에도 이미 리걸테크(LegalTech) 솔류션을 계약해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 내 30대 로펌 중 25곳이 해당 회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으며, 지자체 도쿄도와는 법무행정의 자동화를 위한 실증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일본의 AI 활용 채용 관리 시스템 스타트업을 이끄는 쇼다 이치로 헤르프(HERP) 대표도 “디지털청이 우리 프로그램을 먼저 구입해 사용하면서 다른 부처들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며 “정부 부처와의 협업은 사업을 키워나가야 하는 스타트업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디지털청에는 스타트업 출신 인재가 많아서 우리 시스템을 빠르게 이해하고 도입했다”면서 “디지털청이 스타트업 서비스를 도입한 자체가 일종의 상징적인 메시지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AI 엔지니어 매칭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인 파인디(Findy)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디지털청뿐 아니라 도쿄도 산하 GovTech Tokyo와 협력해 공공기관 엔지니어 채용을 지원하고 있고 실제 매칭 시스템이 정책 검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야마다 유이치로 파인디(Findy) 대표는 “AI 정부로의 전환은 스타트업에게 커다란 비즈니스 기회이다”고 말했다.
규제완화 중요…정부 발주 확대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2022년 이후 스타트업 법·제도 개선, 보조금 확대, 규제 완화 등에 이어 ‘발주 확대’라는 실질적 전환 단계에 돌입했다. 국내 AI 기업인 리베라웨어 관계자는 “최근에 사실 2~3년 사이에 일본 정부 주도 하에 DX(디지털 전환)이 되게 화두가 되어서 정부가 보조금도 많이 지급했고, 규제 같은 것들도 많이 풀어줘서 DX 관련된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앞장서 규제 완화를 하고 민간의 기술 도입과 발주 확대로 이어지는 AI 정부의 선순환 구조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규제 완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본 AI 스타트업도 목소리를 냈다. 일본의 대표적인 IT 인재 매칭전문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는 소메야 켄타로 라프라스(LAPRAS) 대표는 “기존의 규제 때문에 사용자가 실제 사용을 못하는 상황은 굉장히 불행한 사회다”면서 “확실히 정부에서 빨리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어느 정도 이 규제를 빨리빨리 완화해 주는 것들이 제일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국은 AI 정부 전환에 있어 아직 속도가 더딘 편이다. 디지털청과 같은 통합적 주무 부처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정부가 민간 AI 기술을 실질적으로 도입해 사용한 사례도 극히 드물다. 국내의 한 AI 스타트업 대표는 “정부는 말로만 AI 육성을 말할 뿐이고 보여주기식 정책이 많다”면서 “AI 스타트업은 판로가 없고, 정부가 첫 구매자가 되는 경우도 없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AI 정부로 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을 장려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가 선구매자로서 책임 있는 소비자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AI 정부의 본질은 단지 첨단 기술을 이해하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 기술을 직접 구매하고 사용하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英, 첫 성장구역 지정…"AI 도입효과 865조원"'
한편 구조적 저성장 기조 속에서 인공지능(AI)을 통한 돌파구를 찾는 나라는 일본 뿐만이 아니다. 특히 제조업 기반이 약한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AI에 집중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영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올 초 50개 항목으로 구성된 AI 전략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 슈퍼컴퓨터를 새롭게 구축하고 공공 컴퓨팅에 구축에 들어가는 자원(AIRR)을 2030년까지 20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단순히 공공의 연산 능력을 확대하는 것을 넘어 교육, 도로 유지 보수 등의 공공 서비스 역량을 강화해 10년 동안 최대 4700억 파운드(약 865조 원)의 경제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영국 정부의 구상이다. 여기에 ‘AI 성장 구역’을 지정해 각종 규제를 없애고 전력망을 깔아주는 한편 민간투자를 집중 유치하기로 했다. 영국의 1호 AI 성장 구역은 옥스포드시 남쪽의 컬럼이라는 작은 마을로 결정됐다.
영국 정부는 이 같은 조치를 통해 국가 AI 시장이 2035년 1조 달러 이상의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미 다양한 공공 부문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다. 세금·복지·비자·여권 등 정부의 허가 처리 과정에 AI를 활용해 공공 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목표다. 현재 영국의 정부디지털서비스(GDS)는 연금 규제 기관과 협력해 미래의 연금 제도 동향을 예측하는 데 AI 알고리즘을 활용 중이다. 영국의 국세청(HMRC)도 AI를 활용해 민원 우선순위를 파악한다. 각종 행정처리의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AI를 정부 업무에 적용하고 있는 추세다.
규제 개선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영국의 과학혁신기술부는 2023년 ‘인공지능 규제 백서’를 발간했다. 이는 2022년 제안된 ‘인공지능 규제 프레임워크’에 담긴 규제 이행 원칙과 방안을 구체화한 것이다. 백서에는 AI 샌드박스와 테스트 베드가 필요하다는 지침이 담겼다.
구체적으로 단일 분야에 속하는 상품·서비스에 다수의 규제 기관 승인이 필요한 경우를 중심으로 샌드박스를 우선 추진하고 추후 ‘복수 분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AI 상품이나 서비스 출시에 다수의 규제 기관이나 규제 지침이 관련된 경우 시장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 있는 만큼 우선적으로 규제를 풀고 사후 조정하는 방침으로 혁신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국 정부는 기술 규제가 아닌 AI 오남용 규제, 획일적 규제가 아닌 구체적 상황에 따른 유연한 규제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도 지난해 12월 AI 기술 진흥을 위한 법적 근거를 담은 ‘AI 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향후 마련될 시행령에 따라 규제의 범위와 요건 등이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준만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AI는 인프라가 없으면 성장할 수 없는 산업”이라며 “국가 수준에서 콘텐츠를 만들 필요는 없어도 AI가 잘 운영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드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AI 정부' 1위는 사우디…정부기관 39%가 이미 활용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도 인공지능(AI)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고 있다.
중동의 맹주 국가인 사우디의 움직임이 가장 빠르다. 사우디는 2023년 정보통신기술(ICT)에 국가 주도로 270억 달러를 투자한 바 있고 지난해 4월에는 약 400억 달러(57조 원) 규모의 AI 펀드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대규모 데이터 센터, 반도체 제조 업체 등 AI 관련 사업을 지원할 예정이다. 2019년 설립된 사우디 데이터 및 인공지능 당국(SDAIA)의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까지 사우디 국내총생산(GDP)의 12%는 AI가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사우디의 AI 역량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데는 정부의 역할이 크다. 영국의 토터스 미디어가 발표한 2024년 글로벌 AI 지수에 따르면 사우디는 ‘AI 정부 전략’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미국은 2위, 한국과 중국이 공동 3위를 기록했다. 토터스 미디어는 2019년부터 매년 국가별 AI 역량을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는 총 83국을 대상으로 국가별 점수와 순위를 산정했다. 보고서는 “사우디는 향후 10년 간 AI에 대한 대규모 정부 투자 등의 정부 전략으로 1위를 차지했다”며 “최근 글로벌 AI 민간 자금 조달은 둔화되고 공공투자 규모는 증가하는 추세”라고 평가했다.
사우디는 특히 정부 기관 내 AI 도입을 가속화해 AI 산업 성장을 꾀하고 있다. 지난해 이미 정부 기관의 39%가 AI를 사용하거나 실험하고 있으며 정부 기관의 43%는 지난해 혹은 올해 AI 프로젝트에 예산을 배정했다.
기업에 대한 투자 의지도 크다. 사우디의 벤처캐피털 회사들은 AI 스타트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2023년 기준 AI 분야 투자액은 전년 대비 14% 증가한 17억 달러를 기록했다. 사우디 정부는 2030년까지 200억 달러의 AI 투자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김선주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AI 분야에서 정부의 공공투자 목표는 결국 산업을 키우는 것이어야 한다”며 “기업이 성장하면 일자리도 늘고 생태계도 조성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도 투자와 스타트업 육성,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