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본다. 몇 해 전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보고 나서 감독의 다른 작품을 찾아 정주행했다. ‘걸어도 걸어도’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등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가족이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세상과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콧잔등이 시큰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을 극장에서 본 것은 7년 전 개봉한 ‘어느 가족’이 유일하다. 영화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6명의 사람들이 한집에 모여 가족으로 지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엄마 격인 노부요를 중심으로 할머니, 남편, 여동생, 아들, 딸은 혈연 지간 못지않은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에 이어 생계수단인 도둑질이 들켜 과거 행적이 드러나면서 가족은 해체되고 뿔뿔이 헤어진다.
얼마 전 방한한 고레에다 감독은 모성을 탐구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평소 엄마는 아이가 태어나면 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는데 한 지인으로부터 ‘모성이 생겨나지 않아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남성의 편견’이라는 지적을 받고 반성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엄마 역할인 노부요는 불임 여성이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지만 실상 유괴나 다름없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친부모로부터 학대받은 딸이 원래 가족으로 돌아가고, 아들 역시 새로운 가정으로 입양되는 것으로 결정되자 노부요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울부짖듯 반문한다. “무조건 낳기만 하면 엄마가 되느냐”고. 그는 아들과 딸에게 엄마였을까. 한 지붕 아래 모였던 그들은 가족이었을까. 영화는 가족이란 어떠한 존재인지,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배경인 일본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도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의 형태가 바뀌고, 가족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가족의 형태만 놓고 보면 3대가 함께 사는 경우는 많이 줄어든 대신 1인 가구가 급격히 늘었다. 2023년 기준 국내 1인 가구는 783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35.5%를 차지했다. 한부모가정도 약 150만 가구에 달한다. 전체 가구 중 약 10% 이상을 차지한다. ‘싱글맘’과 ‘싱글대디’가 익숙한 용어가 된 것처럼 한부모가정이 일반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친구나 애인과 함께 사는 ‘비친족 가구’도 2021년 101만 5100명으로 처음 100만 명을 넘어섰다. 비친족 가구는 8촌 이내 친족이 아닌 남남끼리 사는 5인 이하의 가구를 말한다. 결혼과 혈연에 묶인 전통적인 가족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혼·사실혼과 동거가 늘고 있는 추세여서 앞으로는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적 기본 단위’라는 가족의 정의가 달라지고 범위도 더 넓어질 것 같다. 혼인과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주거를 같이하는 사람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다. 가족의 재구성과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다. 가족 형태가 바뀌고 범위가 확대되면 사회 제도도 달라지고, 법 체계도 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이러한 사회 변화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가족 정책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가 할 일이 많아졌다. 취약·위기 가족 지원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위한 정책 개발이 요구된다. 한부모가정과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학교 밖 청소년과 위기청소년을 보다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해체 방침이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면서 존치되고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지 오래다.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에 의해 훼손됐지만 여가부의 존재 가치는 분명하다. 가족·청소년 정책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이다.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해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셈법에서 출발한 여가부 폐지 방침이 철회되고 미래 지향적인 가족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부처로 거듭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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