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나 관광객들의 손발이 되는 지하철 부속 시설 표지판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불편함을 낳고 있다.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기괴한 단어를 지하철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로마자표기법을 통일하고 관광객 친화적인 번역 표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6일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찾은 서울 종로구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 설치된 ‘종각역 하행승강장’ 표지판의 번역은 ‘Jonggagyeokhahaengseunggangjang’으로 상행승강장과 중앙통로 역시 ‘Jonggagyeoksanghaengseunggangjang’ ‘Jonggagyeokjungangtongro’로 번역된 채 부착돼 있었다. 띄어쓰기조차 되지 않은 표기로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관광객은 물론 한국인조차 이해는 고사하고 제대로 발음하기조차 어려웠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역·상왕십리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레드에서도 이 같은 사실에 당황스러움을 느낀 외국인의 게시물이 올라와 공감을 받고 있다.
이는 지하철역 상·하행 승강장, 중앙통로 등이 ‘내부도로’로 분류돼 도로명주소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2021년 도로명주소법이 개정되면서 행정안전부는 도로명주소 부여 대상의 범위를 건물·구조물 안 통로까지 확대했다. 행안부 주소정보 업무편람에 따르면 지하철 내부에서 이동하는 통로도 도로명주소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도로명주소를 부여받으면서 지하철 부속 시설이 고유명사가 됐다는 점이다.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에 따르면 인공적인 구조물(인공지명)의 경우 용어의 의미를 살려 번역해야 한다. 이 경우 종각역 하행승강장은 ‘Jonggak Station Southbound Platform’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구조물이 아닌 도로로 분류되면서 도로명주소법 시행규칙에 따라 로마자 표기는 ‘소리 나는 대로 하는 것’이 원칙이 된 것이다.
행안부는 의미를 살려 번역할 경우 소방이나 경찰에 긴급 신고 시 위치 파악이 어려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신고자와 접수자 간 위치 안내에 혼선이 발생할 우려가 있고 비(非)영어권에서 별도 영문 표기로 도로명을 안내하는 사례가 없는 점을 참고했다”고 해명했다. 서울 지하철을 관리하는 서울교통공사는 “정부에서 도로명주소를 부여했기 때문에 해당 표기를 바꾸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관광 이동 시 대중교통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지하철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무조건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의미를 살린 번역을 병행 표기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주소정보시설규칙에 따르면 병행 표기 의무는 없다. 오부윤 인덕대 한국어관광서비스학과 교수는 “로마자 표기가 통일돼 있지 않다는 건 국격 문제이기도 하다”면서 “관광 외래어 표기 연구를 전담으로 하는 조직이 신설되고 일본처럼 표지판의 외래어 표기 및 색감까지 통일하는 시스템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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