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통상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우리 정부에 무역적자 해소를 집중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고기·쌀과 같은 농산물 수입, 정밀 지도 반출,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 등과 같은 ‘비관세장벽’ 완화 압박도 이어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통상 당국 관계자는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재 진행되는 한미 협상은 양국이 의무와 권리를 동등하게 부담하는 일반적 무역 협상이 아니고 우리가 미국에 대해 어떤 입장료를 내느냐의 문제”라고 밝혔다. 무역적자 해소와 같은 미국의 요구를 우리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서 장성길 통상정책국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우리 정부 협상단은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미국 워싱턴DC에서 2차 기술협의를 개최했다. 2차 기술협의는 한미 제주 통상장관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별도의 작업반 없이 6개 분야를 순차적으로 논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지만 미국 측의 실질적인 관심은 무역적자 해소에 있었다는 게 협상단 측 설명이다. 2차 기술협의에는 산업부 외에도 기획재정부·외교부·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고용노동부·금융위원회 관계자들이 배석했다.
미국 측의 분야별 구체적 요구 사항을 확인한 통상 당국은 6·3 대선이 끝난 직후 새 정부의 지침을 받아 본격적으로 ‘7월 패키지’의 윤곽을 짜겠다는 입장이다. 1차 기술협의와 2차 기술협의 사이에 약 20일의 시차가 있었으니 6월 중순께 3차 협의를 진행한다고 가정하고 그사이 실질적인 협상 전략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번 기술 협의는 양측이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서로 교환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3차 기술협의에서는 새 정부의 지침에 맞춰 협상을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미국은 경제안보 영역에서 일방적으로 요구 사항을 제기하기보다 한미 양국이 함께 공급망 안보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공급망 안정화·다변화나 민감 기술 통제 등 한미 양국이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하다”며 “양국 협력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산업부에 따르면 관세 협의와 별도 트랙으로 진행되는 환율 협의는 이번 2차 기술협의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이외 영역에서 미국 측은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에서 다뤄진 내용들을 중심으로 요구 사항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미국은 3월 연례 NTE 보고서를 펴내며 한국의 △30개월 미만 소고기 수입 제한 △수입차 배출 가스 규제 △정밀 지도 반출 제약 △무기 수입 시 기술이전 요구 등을 비관세장벽으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NTE 중심으로 요구 사항을 제시한 것은 제한된 기간에 18개국과 동시 협상을 진행하면서 나타난 궁여지책이라고 분석했다. 국가별로 요구 사항을 세밀하게 다듬을 수 없어 기존에 작성한 NTE 보고서를 활용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산업부에 따르면 미국 관세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무역대표부(USTR)의 실무 인원이 200명 안팎에 불과한데 2차 기술협의에 배석한 미국 측 관계자는 총 50여 명에 달했다. 특정 국가별로 담당자를 정해둘 여력이 없어 개별 분야 담당자가 18개 협상국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장상식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무역 협상은 품목이 워낙 많아 통상 수년이 소요되는데 한 번에 복수의 국가와 몇 개월 만에 협상을 타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7월 8일에도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기보다 관세를 유예하고 협상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도 “미국은 중국을 제외하고도 18개 국가와 동시 협상 중”이라며 “6개 분야로 나눠 협상하고 NTE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은 모든 국가에 일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한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한미 관세 협상에 도움이 된다는 진단도 나왔다. 한미 FTA로 상품 관세는 대부분 철폐된 데다 비관세장벽도 꾸준히 FTA 협상 채널을 통해 대화를 해왔기 때문이다. 단기간 내 협상을 마무리 짓기 어려운 원산지 증명 문제도 이미 FTA를 통해 해결됐다. 산업부 관계자는 “원산지 분야는 다른 협상 상대국을 염두에 둔 분야로 보인다”며 “2차 기술협의에서도 원산지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측이 크게 제기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무역 협상 상대국 중 FTA를 체결한 곳은 호주 정도밖에 없다”며 “미국은 대개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한미는 FTA라는 채널이 있어 합의에 도달하기 용이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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