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출범에 맞춰 시중은행들이 상품 판매 관행을 바꾸면서 몸을 낮추고 있다. 고객 민원으로 상품이 해지된 경우 판매 직원의 고과를 더 낮추거나 수익성 중심으로 짜인 핵심성과지표(KPI)를 손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은행권의 공격적인 상품 권유와 불완전 판매, 수익성 위주의 성과지표가 문제 요인으로 거론된 만큼 선제적인 대응에 나선다는 취지다.
3일 금융계에 따르면 전국은행연합회는 지난달 말 시중은행을 포함한 주요 은행들에 상품 판매 개선 방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금융 당국은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고위험 상품 판매 관행을 바꾸겠다고 했는데 이와 관련해 은행연합회가 의견 취합에 나선 것이다. 은행연합회는 각 사의 의견을 종합해 조만간 금융 당국에 제출할 계획이다.
은행들은 KPI를 개편해 불완전판매를 막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으로 소비자 민원으로 인해 상품을 해지했거나 판매 과정이 적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경우 KPI상 감점 폭을 크게 늘리는 식이다. 현재도 감점을 부여하고 있지만 전체 점수에서 미치는 비중이 미미한 만큼 이를 실효성 있게 바꾸려는 의도다. 소비자가 해피콜(상품 판매에 대한 만족도나 설명 이해 등을 확인하는 전화)을 통해 판매 과정 중 미흡한 점을 지적했는데도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 직원에게 추가 페널티를 매기는 안도 거론됐다.
KPI는 은행이 직원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 만드는 일종의 점수표다. 점수가 높아야 승진을 할 수 있고 성과급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어 직원들이 어떤 업무에 신경을 쓸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은행들이 이를 손보려는 것은 KPI가 여전히 상품 판매 실적에 따라 좌우되다 보니 직원들이 손실 가능성이 높은 상품까지 고객에게 권유하는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금융 당국의 지적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은행권에 대한 제도 개선 압력이 커질 수 있는 점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공약집을 통해 은행의 KPI 설계 시 평가 항목의 수익성 편중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민의힘 역시 공정기금을 도입해 불완전판매, 불공정거래 등에 의한 투자자 피해를 우선 배상하겠다고 했다. 정치권의 문제의식이 큰 셈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KPI 조정은 은행의 전체 실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면서도 “새 정부에 밉보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코드를 맞출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은행 일각에서는 KPI를 과도하게 손질하면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사가 고의로 손해를 끼치는 일은 막아야 하지만 상품이 정상적으로 판매됐는데도 민원을 이유로 판매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지나치다는 논리다. 금융사의 상품 포트폴리오가 예금이나 적금처럼 안전 상품 위주로 획일화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수익률 변동이 큰 상품은 민원이 잦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서는 페널티 위주의 성과 보상 체계 대신 소비자 보호 항목에 가점을 부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고객이 수익을 얻은 경우 상품을 설계하거나 판매한 임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고객 민원 제기 횟수가 적으면 추가 점수를 주는 식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사와 고객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창구 직원이 자발적으로 소비자 보호에 나서도록 하는 ‘넛지(nudge·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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