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통상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국은 비상계엄·탄핵 사태로 리더십마저 실종되는 암흑기를 겪었다. 공백을 채운 건 기업인이었다.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경제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찾아 백악관·정부·의회 고위 관계자를 만났고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백악관에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단연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의 역할이 컸다.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트럼프 정부에 미 경제에 대한 한국의 기여를 적극 알리는 한편 양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미국산 구매 캠페인 ‘바이 아메리카’를 전개하며 가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3월 하순 마이크 던리비 알래스카 주지사 방한 일정을 도맡아 미국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확대를 포함한 한미 에너지 협력의 기초를 닦은 것도 그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4일 서울 여의도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 새 정부를 향한 조언과 기대를 들었다.
김 회장은 이 대통령을 처음 만났던 10년 전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2015년 2월 당시 김 회장은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대표이사로서 경기도 성남시장이던 이 대통령을 처음 대면했다. 그는 “성남시에서 먼저 업무협약(MOU)을 맺자고 연락이 왔다”면서 “클라우드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인데 이 대통령은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MOU로 성남 지역 벤처기업은 한국MS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3년간 무상으로 이용했다. 이 일로 김 회장의 뇌리에는 ‘이 대통령이 산업과 기술 이해도가 높은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자리했다.
김 회장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이 대통령과 두 차례 회동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미국이 한국에 제일 중요한 나라이고, 나도 비즈니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며 “대통령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한국이 잘 될 거고, 기업인들과도 잘 맞을 거라고 본다”고 확신했다. 재계를 중심으로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기업보다 ‘친노조’ 성향을 보인다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이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그러면서 이 대통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대통령 대선 캠프 인사들과 선거 기간 소통을 많이 했는데 실무진들의 기획 능력이 좋았다”면서 “(정부를)좋은 분들로 잘 조직화한다면 기회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새 정부가 출범한 만큼 정치인과 관료, 학계 인재들이 몰리겠지만 기업인을 중용할 것을 제안했다. 김 회장은 “강력한 리더십과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 없이는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기 어렵다”면서 “현장의 인사이트와 실용적 해법을 알고 있는 기업 리더들이 국정 개혁에 참여해야 변화가 현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기업하기 좋은 한국’을 수차례 언급했고 취임사에서도 ‘산업 강국 도약’을 외치며 네거티브 중심의 규제 개선과 자유로운 기업 환경을 약속했다.
이 대통령이 이 같은 공약과 발언을 실천하고 싶다면 기업인을 적극적으로 국정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인 성공 여부는 비전을 뒷받침할 인사와 팀에 달려 있다”며 “올바른 인사, 그리고 강력한 팀워크 없이는 아무리 좋은 공약도 실행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앞서 이 대통령은 6일 저녁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관세 협의를 조속히 마무리하기로 했다. 김 회장은 한미 협상 과정에서도 기업인의 역할이 크다고 봤다.
미국은 한국과 교역에서 적자 폭을 줄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미 흑자가 많은 배경에는 트럼프 1기 이후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미국 내 생산 거점을 늘리는 외국인직접투자(FDI)를 확대한 영향이 크다. 미국 공장에서 쓸 소재와 부품, 장비 상당 부분이 한국에서 수출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적자가 늘어나는 구조다. 한국이 미국 내 투자를 늘리고 고용과 지역 발전을 위해 애썼는데 대미 흑자로 관세를 부과받는 억울한 대목이다.
미측의 이런 오해는 ‘스토리텔링’ 부족 때문이라고 김 회장은 생각한다. 그는 “미국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 제조업과 공급망, 에너지 안보에 기여하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단순 통계를 넘어 한국의 투자가 미국 내 혁신과 경쟁력 강화, 그리고 지역사회 일자리 창출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단순히 무역수지나 통계가 아니라 한국이 미국 경제에 깊이 뿌리내리고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최고의 스토리텔러로 기업인을 지목했다. 그는 “최 회장, 정 회장 같은 한국 기업 리더들의 역량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라며 “조지아와 텍사스, 오하이오 등지에서 한미 협력이 가져온 실질적 혜택을 보여주며 미국 파트너들과 더 깊은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트럼프 정부의 주요 장관이 기업인 출신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트럼프 대통령부터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모두 기업인 출신이다. 김 회장은 “기업인과 기업인이 만난다면 한미 간 소통은 한층 쉬울 수 있다”며 정부를 대표하는 내각 인사나 특사로 기업인을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한국이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변신하기 위한 또 다른 과제는 규제 방향이다. 그는 “미국 기업들의 가장 큰 한국에 대한 우려는 예측 가능성이 낮은 조세·노동 정책을 포함한 전반적인 규제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암참은 올 초 이와 관련해 ‘2025 국내 비즈니스 환경 인사이트 리포트’를 발표했다. 미국산 제품과 서비스의 실질적인 시장 진입·확장을 저해하는 12개 주요 산업에서 70건의 규제를 꼬집었다. 제약·의료기기 분야는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불투명한 약가·보험급여 체계, 혁신 치료제에 대한 가치평가 미흡 등을 문제로 제기했다.
김 회장은 “미국 기업의 혁신 기술 도입이 지연되고 있으며 시장 철수(한국 패싱) 위험도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학물질 분야는 선진국 대비 과도하게 복잡하고 엄격한 규제를, 자동차 분야는 환경·안전 관련 기술 규제를 지적했다.
암참의 주장은 미국 기업의 입장을 담고 있는 만큼 한국 내 산업 육성 방향과 충돌하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정권 따라 한순간에 바뀌는 규제 방향은 국내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다. 또 복잡한 규제에 가로막혀 혁신 기술 도입이 늦어져 유망한 국내 기술기업이 꽃을 피우지 못하거나 한국을 떠나는 사례가 끊이지 않은 만큼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 역시 글로벌 개방 경제 속에 성장해왔고 궁극적으로 한국이 아닌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해야 성공하는 만큼 미국 기업들이 요구하는 ‘세계 표준’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김 회장은 “정부마다 규제 개선을 외쳤지만 지속적이지 않았고 기업 환경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부족했다”며 “새 정부는 실제 성과를 내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재명 정부가 규제 개혁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다면 아시아태평양 지역 비즈니스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에 아태 지역본부를 둔 글로벌 기업은 100개 미만으로 5000곳이 넘는 싱가포르나 홍콩(1400개), 상하이(900개)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 그러나 잠재력이 풍부한 만큼 정부 의지에 따라 위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암참은 한국의 교통과 디지털 연결성, 물류 등 인프라는 세계적 수준이고 풍부한 인재와 인공지능(AI), 반도체, 친환경에너지 등 첨단기술 분야 혁신을 장점으로 꼽았다.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해 공급망 회복력과 역내 시장 접근을 중요시하는 글로벌 기업들에 이상적인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에 규제 개혁까지 이뤄지면 ‘화룡점정’이라는 평가다. 김 회장은 “한국은 아태 지역의 선도적 비즈니스 허브가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췄다”며 “규제 불확실성과 경직된 노동정책,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 같은 리스크를 개선해 예측 가능하고 공정한, 개방적인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면 외국인투자가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을 비롯한 암참 사절단은 9일부터 미국 워싱턴을 찾아 백악관과 의회, 싱크탱크 주요 인사를 만나는 ‘연례 도어녹(Doorknock)’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암참은 한국이 미국 내 최대 외국인 투자국이자 고용 창출의 선두 주자임을 강조하고 암참이 한국 내에서 펼친 규제 개선 노력을 강조할 계획이다. 이 대통령 취임 직후 이뤄지는 행사여서 김 회장 등 사절단을 향해 이 대통령에 대한 궁금증과 한국 정책 변화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 회장은 “미국 내에서 이 대통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드물다”면서 “그들에게 내가 느낀 이 대통령과 한국에 대해 잘 말할 거고 우리 같은 제3자의 정확한 시각이 필요한 때”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워싱턴이 한국을 신뢰하고, 한국의 목소리를 반영하도록 힘쓰고 있다”며 “새로운 무역 재편의 시대에는 관세나 협정 못지않게 신뢰와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하버드대에서는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통신 업체인 AT&T 본사 마케팅 총괄과 미국 내 최초 인터넷 부동산 업체인 코코란닷컴 최고경영자(CEO), 비비안인터내셔널 CEO 등을 거쳤다. 그는 이후 한국에서 야후의 투자회사인 오버추어코리아 CEO와 야후코리아 비즈니스 CEO, 한국마이크로소프트 CEO, 한국지엠 CEO 등을 지냈다. 2017년부터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이자 현대모비스 사외이사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