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9일 첫 통화를 통해 당국 간 의사소통을 강화하는 한편 직접 만나 한일 관계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이 취임 이후 해외 정상과 전화 통화를 한 것은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양국 정상이 정오부터 약 25분간 통화를 했다고 밝혔다. 강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통화에서 전략적 환경 속에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한일 양국이 상호 국익의 관점에서 미래의 도전 과제에 같이 대응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강 대변인에 따르면 이날 양국 정상은 견고하고 성숙한 한일 관계를 만들어나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올해 당국 간 의사소통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을 약속했다. 아울러 그간 한미일 협력의 성과를 평가하고 협력의 틀 안에서 지정학적 위기에 대응해나가기 위한 노력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미국에 이어 일본 정상과의 통화를 마치면서 반년 동안 멈춰 섰던 외교 관계에 시동이 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미국·일본 순으로 통화가 진행됐다는 점은 한미일 공조 강화의 의지”라고 말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 “한일 양국의 상호 국익 관점”이라고 강조한 것은 한미일 공조와 함께 미국과 협상에 한일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당장 한일 모두 미국의 관세 압박을 비슷하게 받고 있는 처지에 있다. 즉 미국 관세 압박이 한일 공동 전선을 펼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 견제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포용할 수밖에 없어 지정학적 현실도 한일 간 전략적 공조의 적지 않은 영향력을 말해주고 있다. 이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보다 이시다 총리와 먼저 통화한 것도 이 같은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시바 총리 역시 “이 대통령과 한일·한미일 협력을 활성화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 역시 같은 인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일 간 공조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앞으로 소통 확대를 비롯해 제도적 협력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다. 그러면서도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박홍규 고려대 교수는 “민주당 정권이 다시 집권하면서 문재인 정부 시절의 반일정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구심을 일본은 완전히 버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말보다는 침착한 대응과 외교정책의 ‘이어달리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이재명 정부의 대일 정책을 예의 주시하는 기간이 있을 것”이라며 “화려한 말보다는 정책의 일관성을 가지고 일본과 신뢰를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 분기점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동안의 강성 발언과는 다른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가 일본 당국의 신뢰로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서도 급조된 이벤트보다는 양국의 소통 채널 확대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됐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60주년을 맞아 특별히 정부 차원의 규모 있는 행사보다는 민간 교류를 지원해주고 당국 간 소통 채널을 넓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서로가 신뢰 구축에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 연구위원은 “낮은 단계부터 소통하고 신뢰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며 “입국심사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설치한 한일 전용 입국심사대(패스트트랙)를 연장하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낮은 단계지만 소통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김대중·오부치선언 이상의 스탭업도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학계에서는 1963년 독일과 프랑스가 체결했던 화해협력조약(엘리제조약)이나 한일 협력의 초석이 됐던 1998년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비슷한 급의 ‘동아시아판 엘리제조약’이나 ‘제2의 DJ-오부치 선언’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셔틀외교를 복원하는 현시점에서 조약 선언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은 형편이다. 다만 목표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신 전 대사는 “프랑스와 독일의 엘리제조약은 그 전에 당국 간 소통과 잦은 스킨십을 포함해 학생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는 가운데 성사됐다”며 “장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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