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초 만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고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시각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 이런 현실 속에서 적게는 수시간, 길게는 수개월에 걸쳐 완성되는 회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또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캔버스 위의 물감이란 어떤 존재일까.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5일부터 막을 올린 젊은 작가 6인의 그룹전 ‘넥스트 페인팅’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전시다. 1980년대~1990년대 중반 출생한 고등어, 김세은, 유신애, 이은새, 전명구, 정이지 등 6명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이 가장 오래된 매체인 회화를 통해 이미지 과잉 시대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단순히 전통 회화를 계승하는 것을 넘어 디지털 세대의 시각적 경험이 회화적 가치와 만날 때 생성하는 새로운 미학적 영역을 탐구한다.
전시는 여섯 작가의 작업적 차별점을 잘 드러내는 작품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도입부 격의 공간을 시작으로 2인전 형식의 공간 세 곳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됐다.
유신애와 이은새의 작품으로 꾸며진 첫 번째 방은 대량의 이미지가 속도감 있게 소비되는 현대 사회에서 회화만이 가진 독보적 존재감을 감각하도록 기획됐다. 일례로 유신애의 ‘착취 속 혁신(2025)’은 정통 풍경화에서 볼법한 고요한 들판 위에 지극히 현대적인 파친코 기계가 마치 우상처럼 솟아 있는 초현실주의적인 장면을 통해 구원에 대한 속물주의적 갈망을 시각화했다. 이은새는 미디어가 대상화하는 인물과 사건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면서 얼룩과 상처, 흔적 등 일상에서 부딪친 모든 흔적을 수집해 회화로 옮기고 있다. 일상의 흔한 이미지가 회화로 다시 태어날 때의 의미와 깊이를 만나볼 수 있다.
고등어와 전병구가 참여한 두 번째 방은 회화의 시간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공간이다. 고등어는 불안과 긴장 상태인 신체를 하나의 방으로 인식해 방안에서 벌어지는 이미지들을 밀도 있게 구성한 ‘룸톤’ 시리즈를 선보인다. 전병구는 “풍경과 조각 등이 회화의 주요 소재”라면서도 “장소와 대상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 풍경을 화면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세은과 정이지의 대형 작품들이 내걸린 세 번째 공간은 이른바 ‘스케일의 방’이다. 가로 4.6m, 세로 3m가 넘는 압도적인 크기의 회화들이 자리 잡았다. 이성휘 큐레이터는 “물리적 스케일이 회화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만드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세은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도시 공간을 신체적인 경험으로 포착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직접 본 풍경이나 사물, 주변 인물을 주로 그리는 정이지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다”고 설명했다.
이 큐레이터는 “이들 젊은 작가는 가상성과 물질성의 대립 속에서도 회화 고유의 감각 경험을 지속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디지털 시대의 회화는 역설적으로 가장 차별성 있는 매체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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