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치매역학조사 및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75세 이상 79세 이하 고령자 10명 중 1명, 85세 이상 고령자 10명 중 4명 가까이가 치매를 앓고 있다. 치매에 걸리면 신체 관리뿐 아니라 재산 관리에도 큰 문제가 생기며, 금융자산이나 부동산과 같은 소중한 재산이 보호받지 못할 위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치매 발병 이후에는 금융 자산을 인출하거나 부동산을 처분하려 해도 법원에서 후견인이 선임된 후에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치매머니(인지증 머니)’라고 부른다. 2021년 기준 약 200조 원 규모의 치매머니가 일본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한국도 2023년 기준 약 100조 원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치매가 심화된 후 가족이 신청해 후견인을 선임하는 ‘법정후견제도’를 주로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족 간 분쟁이 발생하는 일이 잦다.
이러한 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제도가 ‘후견계약’이다. 건강할 때 미리 후견인을 지정하고, 개인 돌봄과 재산 관리 방법을 계약으로 정한 뒤 이를 공증하고 등기해 두면 분쟁 발생 가능성이 낮아진다. 자신이 직접 지정한 후견인이 계획에 따라 돌봄과 재산 관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치매머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견계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후견인이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의후견감독인이나 가정법원의 감독 권한이 있긴 하지만, 인력 부족으로 인해 실질적인 감시는 어렵고 사후에는 횡령된 재산을 다시 돌려놓는 수준에 그친다.
미국과 일본은 ‘가족신탁’을 후견제도와 결합해 해법을 마련했다. ‘후견신탁’을 활용하면 주요 재산에 대해 가족신탁을 설정해 수탁자가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후견인은 치매 환자를 위해 생활비, 병원비, 간병비 등을 인출할 수 있다. 수탁자는 재산 보호 권한을, 후견인은 돌봄 권한을 가지며, 이 둘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다.
수탁자는 전문 회사(상사신탁)를 이용할 수도 있고, 가족 중 한 명을 수탁자로 지정하는 민사신탁도 활용할 수 있다. 자산가의 경우 상사신탁을, 일반 국민의 경우 민사신탁을 선택 가능하다. 신탁회사는 누구나 부담 없이 활용할 수 있는 후견신탁 상품을 개발하고, 정부는 이러한 상품에 세제 혜택을 제공하거나 관련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고령화에 스스로 대비할 수 있도록 후견신탁 제도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특히 후견신탁 가입자에게 소득세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보험 활성화를 위해 일정 금액을 소득공제 해주는 것처럼 건강할 때 노후 자금을 적립식으로 준비한 후견신탁 가입자에게 적립금 일부에 대해 세제혜택을 제공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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