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에 보내는 관세 서한을 가장 먼저 공개한 것은 주요 동맹이면서도 대미 안보 의존도가 높은 두 나라부터 압박해 조속한 시일 내 원하는 성과를 내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유세 기간 중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며 한국을 흔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또 ‘동맹도 예외 없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는 한편 특유의 ‘충격과 공포’ 분위기를 조장해 다른 나라들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목적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한국과 일본을 표적으로 삼았다면서 ‘벼랑 끝 전술’의 부활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 유예 시한이 임박한 가운데 영국과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국가와 협상에 진척이 없자 조급함을 드러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단 한국으로서는 상호관세율이 4월 2일 발표된 25%와 변동이 없는 점, 실제 발효일까지 약 3주의 시간이 주어진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현 상황에서 관세율 변동 없이 협상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 선언’을 위해 고강도 압박을 가할 것이 확실시되는 만큼 향후 협상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 외교·통상 ‘투톱’이 워싱턴DC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발송했다. 상대국 정상에게 보내는 편지는 보통 비공개로 전달하는 외교 문법을 파괴하며 압박 효과를 극대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어 오후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찬에 앞서 “좋은 제안을 하면 8월 1일 관세 부과일도 조정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최상의 제안을 가져올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낸 서한 곳곳에서는 강경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5%라는 숫자는 귀국과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고 적었고 “만약 한국이 대미 관세를 올리기로 결정하면 얼마를 올리든 그 수치에 25%가 추가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한미경제연구소(KEI)의 경제정책 분석가인 톰 라마지는 “트럼프의 서한은 진행 중인 협상과 앞으로 진행될 협상을 더 강하게 압박해 한국 정부와 다음 협상 단계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서한에서 관세 조정 가능성을 언급한 것 자체가 미국이 관세를 25%에 두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 공개를 기점으로 관세 협상이 닻을 올린 가운데 한미 양국은 자동차 및 부품(관세율 25%), 철강·알루미늄 및 파생 제품(50%)에 대한 품목별 관세를 놓고 줄다리기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워싱턴을 방문한 여 본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서한이 공개된 후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을 만나 한미 간 제조업 협력 방안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강조하며 자동차·철강 등 품목관세에 대해 우호적인 대우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현재의 자동차·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 완화 없이는 무역 합의가 쉽지 않다는 우리 측 입장을 전달한 것이다. 여 본부장은 전날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도 양국 간 최종 합의에는 자동차·철강 등 품목관세의 철폐 또는 완화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서한에서 ‘상호관세는 품목별 관세와 별도’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어 향후 협상 과정에서 험로가 예상된다. 전 USTR 부대표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부회장은 “이 발표는 다른 나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메시지”라며 “미국이 한일 양국의 최우선 순위인 자동차 관세를 포함한 무역확장법 232조 품목별 관세 완화는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시시하고 있다”고 짚었다.
변수가 많다는 점도 부담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반도체·전자제품·의약품·구리·목재 등에 대한 국가 안보 영향 조사를 진행 중이며 향후 이들에도 품목관세를 예고하고 있다. 더욱 치명적인 관세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만큼 우리로서는 섣불리 양보안을 제시할 경우 협상 카드만 버리고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미 연방국제통상법원(USCIT)이 상호관세를 국가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기반해 부과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판단한 가운데 이에 대한 항소심 결과가 조만간 나올 예정인 점도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소다.
한편 당초 발표된 24%보다 소폭 상향된 25% 관세율을 받아든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시바 총리는 8일 총리 관저에서 열린 미국 관세 조치에 관한 종합 대책 본부 회의에서 “일본 정부는 안이한 타협을 피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지킬 것은 지키는 엄격한 협의를 계속해왔다”며 이같이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