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용자 생산 콘텐츠(UGC) 로블록스에서 한국인 개발자들이 만든 게임 Sol's RNG’. 이 게임은 최근 누적 방문자 수가 13억 명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세웠다. 2023년 말 알파 테스트로 첫 선을 보인지 불과 1년 반 만에 이룬 성과다. 지난 해에는 크리에이터 정산 매출로 60억원을 벌었다. 올해는 두 배인 120억원의 매출을 내다보고 있다. 놀라운 점은 게임 개발자들의 평균 연령이 17.8세라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로블록스에서 게임을 즐기던 이들이 하나둘 모여 게임 개발과 기획, 아트 요소 제작을 분담해 PC방 이용료 외에는 딱히 추가 비용도 없이 시작한 프로젝트로 이룬 결실이다. 한때 부모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게임 콘텐츠를 소비했던 ‘로블록스 세대’들이 이제 로블록스 생태계 내에서 생산자로 우뚝 서는 시대가 왔다는 평가다.
평균나이 17.8세…로블록스 개발진 감탄
“처음에는 ‘너도 이거 해볼래’라고 놀이 느낌으로 시작한 작은 게임이었어요. 구독자 533만명의 ‘스케치’라는 로블록스 전문 유튜버가 저희 게임을 즐기는 영상을 올리고 나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어요.” (김진검 군, 서울 디지텍고 2학년)
2023년 16살이었던 김진검 군과 동갑내기 백지환 군, 봉원철씨가 합세해 개발을 맡았다. 또 다른 16살 동갑내기 조승찬군이 게임 아트 디렉터를 맡았다. 여기에 조 군의 형인 조승헌(21)씨가 합류해 게임 기획과 팬들과의 소통을 맡으면서 게임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다른 확률형 게임과 차별 요소도 만들었다. 캐릭터 주변의 ‘아우라’를 나타내는 날개 등 여러 수집 요소의 완성도가 기존 로블록스 게임에서는 보지 못하는 참신한 요소로 인기를 끌었다. 아우라를 개발한 이들은 김익재(20), 추현성(17)군이다. 이들은 지난 해 로블록스 개발자 컨퍼런스(RDC) 2024에 한국 개발자로는 처음으로 초대를 받기도 했다. 로블록스 개발진들은 아우라 등의 아이디어에 대해 ‘훌륭하다(Amazing)’ 등 감탄사를 연발하며 노하우를 묻기도 했다고 한다.
초등 때부터 10년 업력의 로블록스 네이티브
이들은 소규모로 제작된 Sol's RNG가 빠르게 로블록스에 침투하게 된 요인을 두고 창작자가 모두 ‘로블록스 네이티브 세대’라는 점을 꼽는다. 적게는 15살부터 많게는 22살까지 포진한 개발팀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로블록스를 즐긴 업력은 10년 내외로 비슷하다. 김진검군은 “8살 때 로블록스를 시작했는데 우리 세대에게는 로블록스가 학교 다니는 것처럼 친구를 사귀고 함께 노는 곳이었다”며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고 평판 관리를 하는 것처럼 다른 이용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울디지텍고에 재학 중인 김군은 이미 전교생 사이에서는 롤모델로 통하고 있다. 한때 60억 원에 게임을 인수하겠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게임 기반 소셜 플랫폼인 디스코드 커뮤니티에서 매일 같이 활동하는 82만명의 이용자들을 낙담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용자들과의 끊임 없이 친근한 소통을 진행하는 것도 이 게임의 강력한 인기 요소다. “보통 하나의 게임을 즐기면 그 게임에서 쭉 시간을 보내고 성장해요. 그런데 그 게임이 바뀌면 그간 쌓은 능력치뿐만 아니라 관계도 우정도 날아가는 거죠.”
Sol's RNG 개발진은 매각 대신 게임·콘텐츠 제작사인 벌스워크의 윤영근 대표와 의기투합해 법인 설립을 택했다. 청소년들의 사이드 프로젝트가 어엿한 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윤 대표는 “이전부터 로블록스 생태계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 보고 여러 시도를 했지만 대형 개발사 출신 개발자들도 흥행하는 게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며 “로블록스를 즐기며 성장한 ‘로블록스 네이티브’가 아니면 로블록스를 즐기는 미국 10대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윤 대표는 “아시아 전체로 봐도 Sol's RNG 만큼 의미있는 성과를 낸 게임이 없다”며 “장기적으로 1조원의 매출을 내는 게임으로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블록스 폭발적 성장 “전세계 게임 시장 10% 노린다”
업계에서는 제2, 제3의 'Sol's RNG' 등장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Sol's RNG 사례처럼 로블록스에서 놀던 청소년들이 유저에서 개발자로 변신하는 사례가 앞으로 잇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서비스를 시작해 올해로 20년차에 접어든 로블록스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넘어서 게임과 소셜을 동시에 즐기는 대체 불가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로블록스의 창업자인 데이비드 바수츠키는 지난해 열린 연례 로블록스 개발자 컨퍼런스(RDC) 2024에서 기조 연설을 통해 “로블록스의 성장세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며 “현재는 전체 시장의 3% 남짓을 차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후에 로블록스는 전 세계 게임 콘텐츠 시장의 1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전세계 게임 콘텐츠 시장 규모가 지난해 기준 약 1800억 달러(약 247조원)로 추산되는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로블록스가 가져올 파이가 20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압도적인 성장세는 이 같은 비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올 1분기 로블록스가 공식 발표한 바에 따르면 10대들의 로블록스 일일 체류 시간은 평균 2시간 38분에 달한다. 이는 같은 기간 10대들이 가장 많이 체류하는 소셜 플랫폼 틱톡(58분)의 2.7배다. 이어 인스타그램(52분), 유튜브(47분) 순으로 나타났다. 빠른 성장세는 로블록스가 크리에이터에게 배분하는 수익 정산 규모로도 나타난다. 지난해 로블록스가 크리에이터에게 정산한 매출은 9억2300만 달러(약 1조2700억원)로 전년(7억4100만 달러) 대비 24% 늘었다. 로블록스의 성장세는 더욱 가파르다. 지난 3월 출시된 개인 정원 만들기 시뮬레이션 게임 ‘그로우 어 가든(Grow a garden)’은 출시 세 달 만인 지난 달 동접자 수 2138만명을 기록하며 로블록스 최대 동접자 수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온라인 게임 플랫폼 ‘스팀’의 상위 50개 게임의 동접자 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수치다.
포트나이트, 크래프톤 등 UGC 생태계 합류
로블록스의 성공 사례로 이용자 생산 콘텐츠(UGC) 생태계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게임 업체들도 저마다 UGC를 차기 성장 동력으로 삼고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포트나이트 개발사 에픽게임즈는 2023년 포트나이트 전용 게임 에디터 ‘포트나이트 UEFN’을 출시해 누구나 쉽게 포트나이트 기반의 고품질 게임을 개발하고 배포할 수 있게 했다. 지난 해에는 2만여 명의 크리에이터에게 3억2000만 달러 규모의 수익을 정산했다. 배틀그라운드 개발사인 펍지도 올해 UGC 프로젝트를 본격 시작해 지난 7일 이용자들이 게임 공간 구성 요소, 게임의 규칙 등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편집해 공유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펍지 UGC 알파’를 내놨다. 크래프톤의 메타버스 스튜디오 오버데어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를 대상으로 UGC 플랫폼 오버데어의 알파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로블록스는 게임판 유튜브 플랫폼에 가깝다. 누구나 원하는 게임이 있으면 쉽게 게임을 만들 수 있다 보니 가볍고 확장성이 높다. 기존에 수십명, 수백명의 개발진이 달라 붙어 수년 가까이 게임 제작에 나서며 완성도를 높이는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등 대형 게임과는 문법 자체가 다른 셈이다. 이들 개발팀을 보는 부모들의 시각도 달라졌다. 유망한 분야라고 생각하며 상담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조승헌 대표가 하는 조언은 이렇다. “내가 플레이하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코딩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아도 게임을 만드는 시대가 왔으니 일단 시작해라.” 김군의 다음 목표는 좀비 생존 서바이벌 게임이다. 그는 “생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며 “가장 개인적인 게임들을 만들어야 반응이 온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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