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의 일본 법인 설립을 위한 ‘극비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2008년 봄. 그해 3월 어느 금요일 글로벌사업부로 인사 발령을 받은 6명의 직원은 곧이어 걸려온 전화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주 수요일 일본으로 출국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구체적인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가족 외에는 해외 발령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 “전자사전을 챙겨오라”는 말뿐이었다. 수화기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신한은행 오사카지점장을 맡고 있던 진옥동 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었다.
초기 멤버 6명은 닷새 만에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떠났다. 고(故) 한용구 전 신한은행장과 전필환 신한캐피탈 대표, 박현식 신한은행 자금본부장, 최용제 신한은행 송파지점장, 임진성 신한은행 여신관리부 팀장, 이용경 전 신한은행 부지점장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운명이 바뀐 건 한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실채권(NPL) 매매 사업을 위해 설립된 일본 SH캐피털에 대표로 있던 진 회장은 아침에 집어 든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 금융청이 미국 씨티은행에 첫 은행 인가를 내줬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진 대표는 “이거다” 싶었다. NPL 사업으로 재미를 보게 되면서 현지 일본 은행 인수를 추진해왔는데 계속 허탕을 쳤기 때문이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는 금융사 매물이 많아졌고 쓸 만한 물건도 꽤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전날만 해도 지역 은행 인수가 무산돼 관련 작업을 함께하던 옛 리먼브러더스 직원들과 술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진 대표는 그날로 친분이 있던 엔도 도시히데 당시 금융청 심의관을 찾아갔다. “우리에게도 은행 면허를 줄 수 있겠느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실무자와 함께 나온 도시히데 심의관은 “요건이 되면 가능할 것이다. 준비해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외은 지점은 타행 이체나 예금 보호가 어렵지만 당국의 허가를 받아 법인을 세우면 일본 은행과 동일한 지위를 갖고 영업할 수 있다. 일본 금융 당국이 2007년에야 처음으로 씨티에 법인 설립 허가를 내준 이유다.
진 대표는 해당 사실을 본점에 보고했다. 동시에 라응찬 당시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은행 내부에서도 “일본 금융청이 어떤 곳인데 승인을 내주겠느냐”라거나 “금융청의 반응이 정확한 것이냐” 같은 회의론이 많았다. 진 대표는 6개월에 걸쳐 라 회장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결국 2008년 2월 현지 법인을 추진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진 대표는 오사카지점장으로 발령받아 설립 작업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라 실패는 있을 수 없었다. 오사카지점장이었던 진 지점장은 초기 멤버 6명에 보강받은 정보기술(IT) 부문 인력을 도쿄에 두고 매주 오사카와 도쿄를 왕복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오사카에 머물고 금요일 오전 일찍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넘어가 법인 설립 업무를 본 뒤 다시 일요일 밤에 오사카로 되돌아오는 강행군이 지속됐다. 편도 570㎞의 거리를 매주 왕복하는 일정이 7개월간 계속됐다. 혼자서만 3만 5000㎞가 넘는 거리를 오간 셈이다.
직원들도 절박했다. 내부에서는 “현지법인을 못 만들면 현해탄에 빠져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편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며 택시 탑승도 하지 않고 지하철과 버스만 이용했다. 가족 없이 홀로 파견돼 2인 1실 생활을 했다. 근무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전 6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이뤄졌다. 강요한 사람도 없었는데 모두가 일요일 근무를 자처했다. 1분이라도 지각하면 1000엔의 벌금을 걷어 이 돈으로 한 달에 한 번 도쿄 신오쿠보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법인 설립의 부담감을 이겨냈다. 진 회장은 28일 “30대 직원들인데 18평(59.5㎡) 아파트에 몰아 넣고 준비를 했다”며 “실패한 사람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했다”고 전했다.
일본 금융 당국은 생각보다 더 깐깐했다. 일본 금융청과의 면담은 철저히 사전 약속제로 운영됐고 한번 만나려면 최소 3~4주 전에 일정을 잡아야 했다. 검증 수준도 매우 높았다.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금융청 검증의 칼날은 신한은행에서 신한금융지주로, 나아가 한국 경제 전반으로 확대됐다. 당시 실무 작업을 했던 한 관계자는 28일 “한국 경제에 대한 검증까지 이어지면서 당분간 설립이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현미경 검증에서도 큰 문제가 없자 일본 당국은 2009년 7월 27일, 신한은행 일본 법인 인가 통보를 내줬다. 1982년 재일동포들이 100% 출자해 한국에 설립한 신한은행이 27년 만에 재일동포들의 오랜 숙원이던 일본 현지 은행 설립에 성공한 것이다. 씨티은행에 이어 현지법인 설립 인가를 받은 두 번째 외국계 은행이라는 쾌거였다.
이때부터 실무진은 SBJ의 성공적인 출범에 공을 기울였다. 보수적인 일본 고객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대장성 관료 출신인 미야무라 사토루를 SBJ은행 초대 은행장으로 선임하고 현지 직원을 적극 채용했다. 목표치(700억 엔)의 3배 가까운 예금을 끌어들인 우편예금 ‘대박’을 시작으로 영업망도 확충했다. 외은 지점 시절 때부터 있던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지점을 바탕으로 우에노지점(2009년)과 요코하마지점(2010년), 고베지점(2011년), 나고야지점(2012년), 신주쿠지점(2013년), 도쿄 본점 영업부(2015년) 등 일본 거점 도시를 대상으로 지점을 확충했다.
환전 특화 전략도 전개했다. 도쿄 하네다공항과 후쿠오카공항·하카타항구 등 일본의 주요 관문에 현지 특화 환전소를 운영하는 것이다. 당시 외국계 은행의 공항 환전소 진출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SBJ는 하네다와 후쿠오카공항 내 지점을 확보했다. 이는 현지화 전략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일본 내 공항에 외국계 은행의 환전소가 들어간다는 것은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법인 설립 초기 브랜드 인지도가 낮다 보니 은행이 실재하는지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채용 제안을 했던 직원의 가족이 직접 은행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러 사무실을 찾는 해프닝도 있었다. 일본 금융 당국 출신의 직원을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일본 내 SBJ의 신뢰 구축에 기여했다.
이후 진 지점장은 SBJ법인장을 맡으며 은행의 성장을 이끌었다. 실제로 SBJ보다 먼저 일본 내 은행 설립 인가를 받은 씨티는 일본의 저금리 장기화에 따른 수익성 악화에 2015년 리테일 부문을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매각한 뒤 철수했다. 이 같은 과정 속에서도 SBJ는 영업 기반 유지를 위해 고객에게 경쟁력 있는 예금 상품을 제시하고 지속적인 대고객 캠페인으로 기반 고객을 확보해 예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신한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금의 SBJ은행을 있게 한 기초 공사를 진 회장이 한 셈”이라며 “신한은행의 문화와 철학을 이식해 SBJ은행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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