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대재해(중대 산업재해의 경우 사망자 1명 이상) 발생 사실에 대한 공시제 의무화를 도입하는 것은 자본 및 금융시장을 통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실질적인 제재를 하겠다는 의미다. 기업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주가 하락이 이뤄져야 기업 스스로 산재 예방 체계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다는 게 정부와 이재명 대통령의 판단이다. 하지만 경영계에서는 공시제 의무화가 자칫 경영 활동을 위축하고 ‘나쁜 기업 낙인찍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11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12일 국무회의에서 중대재해 발생 사실 공시제 의무화 등이 담긴 ‘노동안전종합대책’ 일부안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고용부는 공시제 의무화의 방식을 두 가지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상장사의 공시 제도에 중대재해 사실 공시를 추가하는 방안과 노동조합 회계 공시제처럼 별도 홈페이지를 만들어 공시제를 운영하는 방안이다. 정부는 공시제 의무화와 금융권 대출 심사도 연계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이중 제재 체계를 만들 방침이다.
그동안 노동계에서는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해 증시와 주주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왔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2022년부터 올 1분기까지 사망 산재(중대재해) 상위 기업 10곳 가운데 7곳이 국내 증시에 상장됐기 때문이다. 7곳은 대우건설을 비롯해 한국전력공사·현대건설·디엘이앤씨·한화·한화오션·계룡건설산업 등이다. 10곳 중 6곳은 건설사다. 건설사는 매년 사망 산재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다른 업종에 비해 사고 위험이 높다. 이 대통령은 사망 산재가 연이어 발생하자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산재 사망 사고가 상습적으로 발생하면 여러 차례 공시해서 주가가 폭락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중대재해 공시와 증시는 사실상 절연된 상황이다. 상장사는 단일 사망 산재에 대해 공시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시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은 상장사가 공시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상장사는 중대재해가 일어나더라도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경우를 판단해 자율적으로 공시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제주항공이 항공기 사고를 ‘재해 발생’이라는 이름으로 공시한 게 대표적이다. 재해 발생 공시 역시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경우로 제한된다. 최근 3년간 전체 상장사가 재해 발생을 공시한 건수가 고작 18건인 배경이다. 사망 산재 상위 10개 상장사 중 1곳도 재해 발생 공시를 하지 않았다. 또 상장사는 투자 설명서, 사업보고서 등 경영 상황을 알리는 정기 보고서에도 중대재해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게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주주가 중대재해 발생 기업을 감시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방법 또한 마땅찮다.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쿠팡의 반복 산재 해결 토론회’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이사회에 주주제안을 하려면 0.5% 이상의 상장사 지분을 6개월 이상 보유해야 한다. 삼성전자에 주주제안을 하려면 약 1조 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정부 등 기관투자가도 사망 산재 기업 감시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 사망 산재가 반복된 포스코그룹의 포스코홀딩스 최대주주는 지분 8.5%를 쥔 국민연금공단이다. 노동계에서는 국민연금 역시 포스코의 반복되는 사고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다만 상장사에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만만찮다. 경영계는 기업 경영 침해 가능성은 물론 주가 변동 폭을 키워 주주에게 손해를 끼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정부는 공시보다 낮은 단계인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명단과 재해 조사 보고서를 공개하라는 노동계의 요구에도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형사재판이 이뤄지기 전 산재 사망 사고가 일반에 세세하게 널리 알려지는 상황은 무죄 추정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12일 종합대책에 중대재해 발생 기업 공시제 의무화 이외에도 고용부 장관의 작업 중지 명령 강화, 고위험 사업장별 점검 강화 등을 담았다. 고용부는 관계부처와 추가 논의를 한 후 이달 말 최종 종합대책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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