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부품 표면을 처리하는 경기도 안산의 A업체는 올해 초까지 허가도 받지 않고 과산화수소나 황산 같은 위험 물질을 사용해 영업을 이어갔다.
시흥의 B업체도 과산화수소에 대해 주 1회로 규정된 의무 자체점검을 4개월 이상 방치했다. 과산화수소는 농도가 30% 이상으로 높을 경우 강한 산화제로 작용하며 인화·가연성 물질과 접촉 시 폭발과 화재를 일으키는 대표적 위험물질로 꼽힌다. 하지만 두 업체 모두 이런 위험성을 외면한 채 ‘시한폭탄’ 같은 작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화학물질 관리 부실로 대형 폭발·화재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리셀 참사’ 이후 1년 가량 지났지만 위험 물질을 다루는 업체들의 ‘안전 불감증’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다.
31일 경기도에 따르면 2월 3일부터 14일까지 특별사법경찰단이 관할 유해화학물질 취급업체들을 대상으로 벌인 권역수사에서 적발된 13개 불법행위로 12명이 형사 입건됐다. 유형별로 보면 취급기준 미준수가 8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시설 자체점검 미이행(2건)과 유해화학물질 미표기(2건)가 뒤를 이었다.
화학물질 관리 부실은 해당 업체들의 고질적 문제다. 앞서 지난해 6월 이뤄진 권역수사에서도 11건의 불법행위가 드러난 바 있다. 취급기준 미준수의 경우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물질은 사실상 국내 반입 단계에서부터 관리 부실이 만연해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를 포함한 첨단산업 발전으로 위험물질 취급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안전 관리에 대한 인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2020년 74만 9500TEU(1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였던 전국 국가관리 항만의 위험물 컨테이너 수출입 물동량은 지난해 97만 3000TEU까지 연평균 6.7% 증가했다. 같은 기간 위험물 컨테이너 점검에서 위반 사실이 적발된 사례는 총 1890건에 달했다. 표본조사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발견되지 않은 위반 사례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화학 물질이 이같이 허술하게 관리되는 이유로는 영세 업체들의 낮은 인식 수준과 높은 초기 비용이 손꼽힌다.
별도로 물류 창고를 둬야 하는 성분의 경우에도 부지 확보가 어려운 데다 높은 초기 투자 예산 탓에 적법하지 않은 시설이 난립하는 상태다.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위험물은 하역·운송 시 항구를 거쳐 전용 컨테이너에 보관된다. 반입 후 72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반출돼야 하지만 규모가 적지 않은 화주 기업들조차 비용 절감을 위해 관련 법령을 미준수하는 경우가 많다. 업계 한 관계자는 “위험물을 취급하는 국내 특화물류 시장은 그간 전문업체와 외국계 기업을 위주로 형성돼 있었다”며 “과산화수소·벤젠·아세트산 등 국가기간산업의 핵심 원료를 다루는 현장에는 여전히 노후·미인가 시설이 많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이 같은 실태가 언제든 대형 사고를 부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실제 제조 현장뿐 아니라 유통·사용 단계까지 이 같은 위험은 전방위로 확산되는 추세다.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300건의 배터리 화재로 23명의 사상자와 225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배터리 화재는 지난해에도 543건 발생해 전년 대비 51.2% 급증하는 등 최근 5년간 꾸준히 증가세다.
전문가들은 현장의 인식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감시 체계 강화와 함께 자발적 준수 유도 방안도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행 체제에서는 1년에 한두 차례 현장을 단속하는데 그마저도 업체 측에 일정을 사전 통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불시 점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규모 사업장들에게는 물질별 관리 규정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데다 평상시 준수 비용에 비해 적발 확률이 낮아 ‘안 지켜도 실익이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단속과 처벌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기준을 잘 지키는 업체에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