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년 동안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들을 지배해 온 경쟁 중심 예산 지원 방식인 PBS(Project Based System) 제도가 폐지될 예정이다. 1996년에 도입된 PBS 제도는 출연연에 안정적으로 지원하던 출연금을 줄이고 외부 과제 수주 경쟁을 통해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당초 취지는 연구비 지원에 경쟁 요소를 도입해 출연연의 연구활동을 활성화시켜 성과를 높이고 운영의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도 도입 결과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과제 수주를 위해 연구원들이 양적 성과 창출에 집중하는 돈벌이 수단으로 내몰리고, 과도한 경쟁으로 연구활동의 불안정성이 높아져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수행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이 대두되었다.
출연연의 지속적인 개편 요구에 마침내 정부가 PBS 제도 폐지 결정을 내림에 따라 출연연 연구원들은 연구환경 개선과 함께 새로운 운영시스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단순히 인건비와 연구비 지원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연구 환경 개선에 한계가 있어 PBS 제도와 연동되어 작동하는 여러 관리 제도(내부 연구체계, 조직관리, 평가와 인센티브)들에 대한 개선 필요성을 제기한다. 더구나 그동안 출연연이 다수 정부 부처의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해와서 이를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단순히 연구비 조정 수준을 넘어 담당 역할 조정과도 관련된 어려운 사안이다.
정부는 PBS 제도 이후 출연연의 새로운 운영 제도로 임무 중심 연구체계 도입을 제시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PBS 제도 폐지에 대한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새로운 출연연 운영체계의 도입은 지금의 시대적 상황에서 출연연의 국가적 역할 제고와 발전 측면에서 요구되는 시스템적 전환으로 인식해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 생태계를 오염시킨 PBS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그동안 출연연 연구 생태계를 왜곡시킨 제도와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새롭게 도입될 운영시스템이 무엇이든지 이번 기회에 연구 생태계를 병들게 한 직간접적인 제도와 요소들에 대한 혁신적인 조치들이 포괄적이고 선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운영시스템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연연 운영시스템은 정부의 지배를 받는 공공분야에서 관리가 어려운 창의적인 연구개발(R&D)활동을 수행하는 조직들을 운영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더구나 혁신적인 성과 창출 과정이 복잡하고 난해한 속성을 갖고 있어 기본적으로 운영관리의 난이도가 높은 분야이다. PBS 제도는 이러한 복잡한 시스템에서 안정과 경쟁예산의 균형 관리에 실패했다. PBS 제도 이후 대두된 임무 중심 연구체계는 예산 단계 보다 앞선 임무 단계에서 적합성과 명확성을 갖춘 임무 설정이 중요하다. 임무 설정을 위해서는 분야별로 글로벌 전략 분석 역량과 함께 시장 및 기술 변화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연구개발이 임무라는 필요성과 중요성에 부합해야 하며 설정된 임무 달성에 기여하는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 전략적이고 고도의 전문성과 통찰력이 요구되며 실질적 성과 창출이 강조되는 제도이다.
출연연 운영시스템이 PBS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임무 중심 연구체계로 성공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많은 혁신과 발전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시스템 전환 초기에 시스템 개념과 운영 방향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운영 원칙을 흔들림없이 지켜내는 것이 필요하다. PBS 제도 도입 당시 겪었던 혼란과 불안을 줄이고 새로운 운영 체계로 유연하게 이전하기 위한 전환관리도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시스템 전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몇가지 중요한 조건들을 제안한다.
첫째, 새로운 임무 중심 연구체계의 개념과 성격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이전 PBS 제도의 다른 이름은 연구과제 중심 운영제도이다. 출연연 연구비 지원시 경쟁 확대를 통한 연구활동의 활성화보다 연구과제 중심의 지원과 운영을 강조하고 있다. 도입 초기에 제도의 개념과 목표가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 채 설계되어 적용되다 보니 상당기간 많은 혼란이 있었다. 임무 중심 연구체계도 운영개념 설정이 어려워 유사한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기존에 적용된 R&R(Roles & Resposibilities)체제의 모호한 역할 설정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명확한 시스템 개념과 임무 정의가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유럽의 사회문제해결형 임무 지향정책을 답습한 방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젠다 수준의 임무를 나열하고 일부 관련 기술과 연계하는 식의 임무체계는 구체적인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출연연 수준에는 너무 포괄적이며 적합성과 실행력이 결여되어 있다. 구체적인 성과를 얻으려면 미국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처럼 임무가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중요한 문제, 필요한 수요를 찾아 임무로 설정해야 한다. 그 과정이 어려워 DARPA를 모방한 많은 국가들에서 임무 설정에 실패하고 있다. 또한 출연연은 관련 정부부처와의 임무 조정도 필요하다.
둘째, 출연연 운영시스템의 복잡성과 높은 난이도에 대한 기본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제도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출연연 제도 개선은 일부 제도에만 집중된 단편적 개선으로 추진되어 의도한 효과를 창출하기 어려웠다. 시스템이라는 것은 여러 제도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운영시스템은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구성요소 간 관계를 파악해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까지 PBS 제도의 문제라고 제기된 많은 문제들도 그 시발점이 PBS제도이지만 연계된 제도들 간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따라서 부분적인 해법이 아닌 종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더구나 임무 중심 연구체계로의 전환은 지난 30년간 출연연 운영시스템과 정부 연구개발 예산제도를 지배해 온 정책의 철학과 시스템의 운영 패러다임의 축을 바꾸는 것이다.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전문적 이해와 제도 간 관련성 및 체계에 기반하지 않는 시스템 설계는 실패하기 쉽다.
셋째, 출연연 연구생태계의 정상화 및 선진화를 위한 핵심 요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즉, 자율성, 전문성, 창의성, 개방성, 유연성 확보를 명확히 하고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PBS 제도로 인해 창의적 전문성보다는 연구비 조달능력이 중요해진 연구생태계 개선을 위해 안정적인 출연금을 일괄 지원하게 되면 정부의 개입에 의한 경직적인 생태계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정부와 출연연 간의 역할과 책임관계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즉, 출연연의 임무를 설정하는 과정에는 정부와 연구회, 출연연이 상호 교류하면서 적확한 임무설정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임무가 설정된 이후 사업과 기술기획은 출연연에 자율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도전성과 미래지향적인 시드형 연구가 이루어지도록 유연한 관리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출연연이 지식생태계로서의 건전성을 확보하려면 전문성에 기반한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전문성이 가장 중요한 내부 권력으로 작용하는 체제가 구축되어야 하며 전문성에 기반한 인력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기관장에서부터 내부 조직관리자 모두 각 단계에 적합한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전문가 중심 기관 운영의 실행력 제고 차원에서 기존의 보직자 제도보다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전문가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PM) 제도 형태의 접근을 고려해 볼만 하다. 일부 기관에서 이미 시범적 운영을 하고 있고 전문성이 강조되며 역할과 책임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넷째, 새로운 출연연 운영체계로의 전환뿐만 아니라 정부연구개발시스템의 지속적인 혁신을 이끄는 상위 정책거버넌스 구축이 필요하다. 혁신의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고 출연연 운영시스템과 정부연구개발시스템이 함께 조화롭게 발전하도록 국가 전략 수준에서 임무 중심 연구체계를 이끌어가야 한다. 특히 선진화된 연구생태계로의 발전을 위해 연구환경과 문화에 대한 모니터링과 개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요 연구주체들의 연구환경과 역할의 변화를 살피고 산학연 개방과 협력체계의 발전을 선도해 가야 한다. 즉, 출연연을 포함한 국가 연구개발 생태계의 발전과 혁신을 이끄는 상위 정책주체가 필요하다.
지금 출연연은 과거 우리나라 경제 도약기에 수행했던 주도적 역할에 비해 그 위상과 기여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저성장 기조에서 벗어나 국가의 명운이 달린 국가성장동력 확보를 위해서는 다시금 출연연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정부는 출연연을 통한 국가성장동력 기회의 확충을 전략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출연연 운영시스템의 전환은 단순히 출연연의 발전만이 아니라 국가적 성장동력 위기를 타파할 핵심 연구주체로서 역할가치를 높여야 한다. 출연연 운영시스템의 성공적인 전환이 국가연구개발시스템의 발전적 도약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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