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온이 중국 기업의 텃밭이던 미국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조 단위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내년부터 ESS로 최대 7.2GWh(기가와트시)를 공급해 2조 원 넘는 실적을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SK온은 미국에서 ESS용 배터리 양산 체제를 빠르게 구축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과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를 정면 돌파한다는 방침이다.
SK온은 미국 재생에너지 기업인 ‘플랫아이언 에너지 개발’과 1GWh 규모의 ESS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4일 밝혔다. 이번 계약으로 내년부터 플랫아이언이 추진하는 매사추세츠주 프로젝트에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탑재한 컨테이너형 ESS 제품을 공급한다.
SK온은 플랫아이언이 2030년까지 미국에서 추진하는 6.2GWh 규모의 프로젝트에 대한 우선 협상권을 함께 확보했다. 계획대로 추가 수주가 이어진다면 내년부터 4년간 최대 7.2GWh 규모의 ESS 제품을 공급하게 된다. ESS 배터리 1GWh당 수주 금액이 통상 3000억 원인 점을 고려하면 SK온의 수주 규모는 2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SK온이 미국에서 ESS 배터리로 대규모 공급 계약을 따낸 것은 2021년 출범 이후 처음이다. 그동안 미국을 포함한 북미 ESS 배터리 시장은 저렴한 LFP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이 장악해왔다. 실제로 지난해 북미 ESS 배터리 수요 78GWh 가운데 CATL·BYD 등 중국 업체들의 물량은 68GWh로 점유율이 87%에 달했다.
올해 들어서는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대규모 현지 생산 체제, 제품 경쟁력 강화 등 ESS 시장 공략을 위한 사업 전략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산 배터리에 고율 관세를 매기면서 현지 생산 능력을 갖춘 배터리 업체에 대한 시장 수요는 높아지는 추세다. SK온은 내년 하반기부터 미국 조지아주 SK배터리아메리카 공장에서 ESS 배터리 양산에 돌입한다. 신규 공장을 짓는 대신 기존 공장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 라인 중 일부를 ESS 라인으로 전환해 빠른 속도로 현지 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10월부터 전기차에 제공했던 세액공제 혜택을 전면 폐기하면서 현지 전기차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배터리 업계는 ESS 사업 확대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모르도르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미국 ESS 시장은 올해 36억 8000만 달러(약 5조 1200억 원)에서 2030년 50억 9000만 달러(약 7조 1000억 원) 규모로 연 평균 6.7% 성장할 전망이다.
SK온의 이번 수주는 높은 수준의 제품 안정성을 확보한 결과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수많은 배터리를 탑재한 ESS 특성상 열 확산을 방지하는 기술이 요구되는데 SK온은 ‘전기화학 임피던스 분광법(EIS)’ 기반 배터리 진단 시스템을 적용해 차별화를 꾀했다. 이 기술은 배터리에 작은 전기 신호를 보내고 배터리 내부 저항과 반응 특성을 파악해 배터리 상태를 진단하는 방식으로 열 확산 등 이상 징후를 파악하는 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SK온은 ESS 시장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하고 사업 역량을 강화해왔다. ESS 배터리는 신재생에너지 확산과 인공지능(AI) 산업 발전 등으로 꾸준한 수요가 예상된다. SK온은 지난해 12월 ESS 사업실을 대표이사 직속 조직으로 격상하며 성장 기반을 다지고 있다. 올해 말 예정된 국내 배터리 ESS 프로젝트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생산 계획도 수립할 예정이다.
최대진 SK온 ESS사업실장은 “SK온은 이번 계약으로 배터리 케미스트리(소재 구성)와 사업 포트폴리오를 동시에 확장했다”며 “앞으로도 첨단 배터리 기술과 현지 생산 역량을 바탕으로 추가 고객사를 확보해 북미 ESS 시장에서 입지를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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