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잔디 상태 괜찮은데?”
올여름 라운드를 나가본 골퍼들은 기대 이상의 잔디 컨디션에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물론 골프장에 따라 차이가 있고 불만을 피하지 못할 수준의 상태를 보인 곳도 있지만 대체로 지난해 여름에 비하면 훨씬 낫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골프장 업계는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덮친 탓에 잔디 관리에 최악인 여름을 겪었다. 잔디가 타다가 익기를 거듭하며 버텨내지 못한 끝에 맨땅을 훤히 드러냈고 골퍼들의 불만과 안타까움이 이어졌다. 더 큰 걱정은 기후의 역습이 매년 역대급을 경신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올여름의 끝자락이자 달력상 가을의 초입을 맞아 골프장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잔디 교체 승부수가 적중한 영향이 크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상당수 골프장들은 이른바 ‘잔디 재건축’에 나섰다. 확 바뀐 국내 기후를 그나마 견뎌낼 만한 새로운 잔디 품종으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티잉 구역의 잔디만 바꾸는 곳은 부지기수고 페어웨이 잔디까지 싹 갈아엎는 곳도 많았다. 켄터키블루그래스에서 중지로의 교체가 일반적이다.
잔디는 선선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한지형과 여름철에 잘 생육하는 난지형으로 구분되는데 켄터키블루그래스는 한지형, 중지는 난지형 잔디의 일종이다. 흔히 양잔디·한국잔디로 각각 불린다. 양잔디는 밀도가 높고 질감이 부드러우며 연중 ‘초록’을 유지하는 기간이 길다. 하지만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기면 힘들어해 여름철 관리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난해 심각한 잔디 피해는 양잔디 골프장에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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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품종 교체에는 18홀 페어웨이 기준 40억 원 안팎이 들고 작업 기간 영업손실도 감수해야 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최악의 여름을 경험해본 골프장들의 위기의식은 그만큼 절박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KB금융 스타챔피언십이 열리고 있는 블랙스톤 이천도 잔디 재건축을 마친 곳이다. 올 1월부터 5월까지 9홀씩 차례로 문을 닫고 27홀 전체의 페어웨이와 러프를 켄터키블루그래스에서 중지로 교체했다. 교체 비용으로 약 65억 원이 들었고 이 과정에서 20억 원가량 영업손실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골프장 관계자는 5일 “자연 지형을 살린 설계 철학 등 자부심이 큰 골프장이었는데 잔디 상태로 인해 사실 직원들도 속상했다. 이번 교체 작업에 직원들도 투입돼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다시 호평을 받게 돼 뿌듯한 마음”이라고 했다. 참가 선수인 노승희와 이가영은 각각 “잔디가 달라지고 코스 컨디션이 정말 좋다” “중지로 바뀌면서 코스 상태가 정말 좋다”고 평가했다.
양잔디 골프장이던 해남 파인비치도 4월에 잔디 초종 교체 공사를 마무리했다. 고온에 강한 신품종 난지형 금잔디를 심었다. 여주 360도도 한국잔디로의 교체를 5월에 마쳤고 안성 마에스트로 역시 양잔디 골프장에서 한국잔디 골프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가평 아난티는 일단 러프부터 한국잔디로 바꿨다. 한국잔디연구소의 회원사 골프장 집계에 따르면 페어웨이가 한국잔디인 골프장이 80여 곳이고 양잔디 골프장은 20여 곳에 불과하다.
양잔디 골프장 중 일부는 올해도 지난해처럼 잔디 피해로 속앓이를 했지만 무난하게 여름을 난 곳도 많다. 춘천의 한 양잔디 골프장의 코스관리팀장은 “양잔디는 고온 다습한 환경이 최악이고 고온 건조는 그래도 견딜 만한데 지금까지는 그렇게까지 습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지난해의 학습 효과가 있어 대비가 잘 되기도 했다. 여름철에 오히려 비료를 덜 주면서 ‘잔디 다이어트’를 시킨 게 효과를 보고 있다”고 했다. 이천 더크로스비는 한국잔디 골프장인데도 야간에는 9홀 플레이만 운영하며 잔디 관리에 심혈을 기울인다.
골프장 토털 솔루션 기업 이앤엘의 장덕환 부사장은 “올여름도 무척 더웠지만 야간에는 기온과 습도가 그래도 견딜 만한 날이 많았다. 한지형인 양잔디 입장에서도 그나마 생육 환경이 나았다”며 “골프장들은 지난해 잔디 관리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알게 모르게 노하우가 생겼다. 올해를 보내면 통기 작업의 타이밍 등 여러 면에서 또 경험이 축적될 것”이라고 했다. 각 골프장의 코스 관리 실무자들은 배토와 영양분 공급, 선제적인 약제 사용 등 기후변화 속 잔디 관리 노하우를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다. 국내 신품종 개발도 속도가 붙어 10종 가까이가 골프장으로의 공급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잔디로의 교체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이러다 국내에 양잔디 골프장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린다. 양잔디는 정교한 아이언샷을 요구하고 그만큼 스핀도 잘 걸린다. 디봇(잔디 팬 자국)을 내는 특유의 ‘맛’도 있어 어느 정도 숙련된 골퍼는 양잔디를 선호한다. 장 부사장은 “(양잔디 골프장이 없어질) 가능성은 충분한 얘기”라고 했다. “그동안 양잔디 골프장은 골퍼들의 선호에 그린피를 상대적으로 높게 받을 수 있어 비싼 관리 비용에도 품질을 유지할 명분이 있었지만 극한에 가까운 여름이 매년 계속된다면 테크닉으로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버린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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