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달 말 “우리는 여러 차례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금융시장 안정과 금융사 건전성을 우선시하는 업무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고 밝혔다. 금융정책과 감독을 나누고 금융소비자보호원을 신설하는 내용의 금융 감독 체계 개편안이 무산됐지만 소비자 보호는 계속 강력하게 챙기겠다는 뜻이다.
금감원 안팎에서는 소비자 보호 강화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건전성 감독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9일 “건전성과 소비자 보호는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며 “건전성을 중시해서 소비자 보호에 소홀하게 됐다는 식의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도 금융소비자 보호를 맹목적으로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나 담보인정비율(LTV) 담합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은행권은 ELS 사태로 2조 원가량을 자율 배상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따르면 은행의 불완전판매가 인정되면 판매 금액의 5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최근 KB국민은행이 ELS 불완전판매 논란과 관련해 투자자와 벌인 소송 1심에서 승소하면서 과징금이 크게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지만 5대 은행이 팔아 치운 ELS만 14조 원이 넘는다.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천문학적인 과징금이 부과되면 ‘경계 효과’는 있겠지만 수익 감소에 금융사 건전성이 급락해 금융 안정 문제로 번질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주장하고 있는 LTV 담합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논란이 커지고 있는 삼성생명의 유배당보험도 비슷하다. 삼성생명은 1980년대에 유배당보험 가입자로부터 받은 보험료로 삼성전자 지분을 사들였다. 이들의 권리를 위해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 이를 한 번에 배당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이유다.
다만 이 경우 건전성 측면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삼성생명이 유배당계약자 몫으로 남긴 액수(계약자지분조정)는 올해 6월 말 현재 8조 9458억 원에 달한다. 한 전직 금융 당국 임원은 “건전성 문제까지 따지면 유배당보험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보호의 경우 끝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2018년 윤석헌 전 금감원장은 2013년 대법원 결정이 난 키코(KIKO) 사태에 대해 재조사를 지시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사 자본 비율이 급감하거나 부실이 되면 결국 소비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며 “건전성 감독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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