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간 빚은 크게 늘었는데 소비는 오히려 줄어든 나라는 주요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는 한국은행 분석이 나왔다. 빚을 내면 당장 쓸 돈이 생기지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식 부동산 대출로 매달 갚아야 할 원리금이 급증하면서 정작 소비할 여력은 줄었다는 것이다. 한은은 가계부채를 2012년 수준으로 관리했다면 지금 소비가 5%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은은 30일 '부동산발 가계부채 누증이 소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거시경제 데이터와 가계 단위 미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과도한 가계부채가 민간소비를 0.44%포인트, 0.42%포인트씩 매년 감소시킨 것으로 추정했다. 한은이 앞서 5월 제시한 최근 10년간 소비 구조적 둔화폭 1.6%포인트 중 고령화가 0.8%포인트, 가계부채가 0.4%포인트를 차지해 이 두 요인이 대부분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2012년 수준의 가계부채 비율을 유지했다면 2024년 민간소비가 실제보다 4.9~5.4%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10년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증가 속도는 중국·홍콩에 이어 세계 3위(71개국 중)에 달했다. 같은 기간 가계부채 비율이 10%포인트 이상 뛴 나라들만 비교하면 민간소비 비중이 축소된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했다.
한은은 "부채가 늘면 소비도 늘어야 하는데 한국만 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했다"며 "우리나라 가계부채 규모가 지나쳐서 가계의 차입이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가계부채와 민간소비 간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은 2010년대 초반까지는 상관계수가 0.7 내외 수준으로 높은 정(+)의 관계를 보였다. 하지만 가계부채비율이 80%를 넘어선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상관계수가 마이너스(-)로 추정됐다.
한은은 소비 제약의 핵심 원인으로 원리금 상환 부담 급증을 꼽았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원리금 부담(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상승 속도는 세계 2위 수준이다.
DSR 상승의 주범은 금리가 아니라 빚 자체였다. 대출잔액 증가가 DSR을 5.4%포인트 끌어올린 반면, 금리 상승 효과는 0.25%포인트에 불과했다. 한은은 "금리 인상이 아니라 과도한 부채 누적이 가계를 압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가계부채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요인으로는 원리금 부담뿐 아니라 다른 선진국보다 작은 '부(富)의 효과'가 거론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1% 오를 때 민간소비가 0.02% 증가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주요 선진국의 소비 탄력성 추정치(0.03~0.23%)보다 낮다.
주택가격 상승분을 담보로 소비에 활용할 수 있는 역모기지론 등 주택 유동화 상품이 적고, 미래 더 나은 집으로 옮기거나 자녀의 주거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집값 상승을 유동성을 동반한 부의 증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게 한은의 분석이다.
물가 상승을 감안한 실질 아파트 가격도 서울은 올랐지만 비수도권은 되레 떨어져 소비를 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도 봤다.
가계대출 증가분 중 3분의 2에 달하는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은 주택 등 자산에 묶이게 되고 상가와 오피스텔 같은 비주택 투자는 공실률 증가 등으로 수익률이 급감해 오히려 현금 흐름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가계부채 문제는 심근경색처럼 갑작스러운 위기를 유발하기보다 동맥경화처럼 소비를 서서히 위축시키고 있다"며 "다만 최근 정책 당국 간 공조와 적극적 대응으로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하락세로 돌아선 만큼, 장기 시계에서 일관된 대응이 이어지면 가계부채 누증 현상과 구조적 소비 제약도 점차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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