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긴 전성기를 누린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10일 “김지미 배우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고인의 직접적 사인은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인 것으로 전해졌다.
1940년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년)’로 데뷔해 1990년대까지 7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한국 영화계의 대표 스타 배우다. 덕성여고 재학 시절 미국 유학을 계획하던 중 우연히 김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되면서 17세에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데뷔하는 과정에서 얻은 예명 ‘김지미’가 배우로서의 이름이 됐다. 성공적인 데뷔로 주목받은 그는 이듬해 멜로드라마 ‘별아 내 가슴에(1958년)’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년)’ ‘장희빈(1961년)’ 등에 출연하며 1960년대까지 이어지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장식한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토지(1974년)’ ‘길소뜸(1985년)’ 등을 통해 거장들과도 호흡하며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윤정희·문희·남정임이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하기 전부터 활동했지만 선후배 배우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1980년대까지 꾸준히 활약하며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고인은 2017년 기자회견에서 “아마 700편 이상에 출연했을 것”이라며 “700가지의 인생을 살았던 만큼 역할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고인은 한국적인 이미지가 아닌 세련되고 도시적인 마스크로 관객들을 매료시키며 당대 미의 기준이 됐다. 비교적 오랜 시간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뛰어난 외모도 한몫했다. 아름다운 신인 여성 배우가 등장하면 영화계나 대중은 “그래도 김지미만 못하다”고 했을 정도로 그는 미인의 기준이었다. 트로이카의 세 여배우가 젊고 풋풋한 매력을 내세웠다면 그는 노련한 여성미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조 ‘팜파탈’이었던 셈이다. 살인 사건들의 중심에 선 묘령의 여인을 연기한 ‘불나비(1965년)’는 그의 ‘팜파탈’로서의 매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흥행 멜로드라마를 함께 만들어간 홍성기 감독, 당대 인기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 등과의 결혼과 이혼은 스타로서 화려했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에 할리우드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비견되기도 했다. 당시 보수적이던 사회상과는 반대로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이어가며 주체적 삶을 살았던 ‘신여성’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또 고인은 배우로서 끊임없이 스펙트럼을 넓혀 온 연기파 배우이기도 했다. 김수용·임권택·김기영 등 거장들과의 작업은 여배우로서 연기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이기도 했다. ‘토지'에서 대지주 가문을 이끌어가는 안주인 역을 맡아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영화 ‘만추’의 리메이크작 ‘육체의 약속(1975년)’에서 사랑에 빠진 죄수 역할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입증했다.
이산가족 아들을 찾아 나선 중년 여성을 연기한 ‘길소뜸’은 고인의 연기 중 백미라는 평가를 받는다. 후시 녹음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완숙한 연기를 보여준 고인은 이 작품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고인은 제작자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5년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한 뒤 ‘티켓(1986년)’을 비롯해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1995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98년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영화계 여장부’로 꼽히는 고인은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강인한 모습으로 한국 영화계를 지켜왔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미국 현지에서 12일 고인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을 고려해 별도의 영화인장은 치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추모 공간을 마련해 고인을 기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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